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게 되었는가? 海兵精神. by oldmarine 2008/02/29 10:22 marinekslee.egloos.com/8510607 덧글수 : 0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게 되었는가?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며 싫어했는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져 버렸을 지난 일들 일 수 있으나 오늘의 해병들에게 선배해병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당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자부심으로,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세하고 있었으나 부득기한 사실을 비하의 구실로 삼았던 오래 전의 우리들 자신이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해병들이 육군을 비하하고 싫어하게 된 무엇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중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여기에는 특히 우리의 형제 해병대인 미 해병대도 우리에게 미 육군을 Doggy Army라고 비하하여 부른 것도 한목했었다. 그 당시 한국 해병대는 초창기였는지라 미 해병대의 작전통제하에 상당 기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오늘날의 미 해병들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미 해병들은 우리를 진정 Brother Marine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를 여러모로 도와주었었다. 우리도 그들을 Big brother라고 부르고 환대했었다.
1951년 4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그 간의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한국 육군의 작전통제로부터 지휘체계가 변경되면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있게 된 후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일선 연대로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중에 있을 때 우리의 좌측방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에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사단장 S 소장)이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밀려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지 10여 분만에 어이없게 전선이 돌파당하여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의 급속한 돌파구 확장에 따르는 포위에 대비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에 의거 우리, 해병 제1연대는 2박2일 간(당시 필자는 제1대대 첨병소대장이었음) 38도선 이북으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우리가 평생 잊을래 잊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강행군을 계속하였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해병대 전투"(3): "해병 제1연대의 후퇴이동"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음.
그때의 해병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던 육군에 대한 원한 같은 것으로 인하여 육군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육군을 멸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전투지대내에서 발견되는 육군은 장교건 사병이건 모조리 포로로 취급하였다. 그것은 그런 육군을 우리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 감정이 당시의 그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들에 의해 구전되면서 더욱 과장되거나 심화되어 육군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으며 더욱이 그런 육군에는 무엇을 하건 이겨야한다는 선배들의 선동?도 여기에 크게 작용했음은 빼어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당시 우리 해병대는 대육군에 비하면 1개 연대 병력밖에 안되니 숫적인 열세를 이런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이었으며 후퇴이동 중 대대 첨병소대장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해병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순간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으나 다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않은 심정이다. 그때의 해병들은 지금 80대 전후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하여 그로 인하여 우리, 해병들이 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고 또한 우수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우물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하늘 전체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은 어리석은 생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육군은 어디까지나 대육군이기 때문이다. 수가 많으면 그 속에는 약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도 모르고 무턱대고 육군을 깔보거나 싫어하는 해병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날도 종종 보고 또한 그들에 대해서 듣게 되는데 이런 편협된 사고방식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어야 했다. 지금은 이래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거기에 합당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도 모르고 육군을 무조건 싫어하거나 깔본다는 것은 너무나 유아독존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하여 그들이 우리를, 해병대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하며 이는 오래 전의 일이니 이제는 그것이 부득기한 사실이었음을 이해하고 받아드려서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야한다.
50년대에 야기된 육군과의 주요 충돌사건 중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이 실례를 들 수 있다.
1. 열차 속에서의 난동
한국전쟁이 휴전(1953.7.27)된 후(1956년)에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었던 많은 고참 하사관(해병 1, 2기 및 해군 13,14기)들이 전역하고 귀향길에 올라 있을 때의 일이다. 이때 나는 진해에 있는 해병학교의 사관후보생 중대장 이었다. 어느날 교수부장(문희석 중령)을 수행하여 서울행 야간열차인 "통일호"를 탔다. 이때 군 전용열차는 "통일호"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육군 수송관의 해병대 소령이라는 특별 배려로 중령급 이상 장교에게 허용되는 침대칸을 배정 받았다.
침대칸에서 한참 자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해병대 소령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며 나를 환급히 찾는 다급한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왜 그러시요?"하고 대답했다. 일어나 보니 육군 수송관이었다.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열차 안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육군 사병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젔는데 해병대가 육군을 때려 눕히고 싸움을 말리던 헌병까지 두들겨 패서 열차안이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열차가 못가고 정차해 있으니 소령님 나와서 싸움을 좀 말려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이들이 조용히 돌아갈 리가 있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해병대 장교 정모를 쓰고, 물론 장교 약복을 입고 수송관을 따라서 사병칸에 가 보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 광경은 미국 서부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 같았다. 담배 연기까지 자욱했고 술병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나는 사병칸에 들어 서자마자 "왜들 자지않고 이렇게 시끄러워!"하고 이들의 기를 꺽기 위하여 우선 소리부터 질렀다. 그때 나는 26세의 나이였으며 태권도 유단자였다. 순간 조용해젔다. 그런데 뒷쪽에서 "뭐야!"하는 내 목소리보다 더 큰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선채로 그들을 노려봤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 "이 소령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하사관이었다. 이것이 신호나 된 듯 여기 저거서 "이 소령님 웬 일이십니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인사를 듣고도 나는 아무 소리 안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사실은 나는 그들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감격하여 그대로 서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일 누군가 "너는 뭐야!" 했으면 해병대 소령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강성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아마 살인까지 마다했을 지도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한국전쟁 중 소대장, 중대장할 때의 그 전투정신이 생생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해병대의 명예는 일순 간에 땅에 떨어져 버리고 똥이 되었을 것은 분명한 순간 이었다. 그리고 사태는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장교님이다" 하면서 이들은, 해병대 하사관들은 전부 아무 소리 안하고 자기들 자리로 돌아 갔다. 우리가 언제 싸움질 했나? 하는 그런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들은 역전의 용사답게 지난 날에 자기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전투를 한 그들의 상관을 비록 제대하고 귀향 중에 있었지만 존경하고 있었다. 오늘의 해병들도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이 참다운 가식이 없는 순수한 해병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병정신은 어떤 구호나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히 상관을, 또는 남을 위하는 양보이기도 하다. 이것이 참말로 내가 오늘의 해병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2. 육군 공수단 사병들과의 싸움
50년대의 해병들과 육군 공수단 사병들 간의 관계는 마치 견원지간의 사이 같았다. 때문에 부득기 충돌도 종종 피할 수 없이 있었다. 통상 그 시비는 영등포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소속된 군의 우월성의 자랑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도에 넘치게 되면 싸움으로 번졌다.
그날은 육군 공수단 소속 사병이 해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자기들의 김포공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공수단 본대에 보고한 후 보복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김포공항 앞 버스정류장에서 해병들이 탄 버스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영등포에서 강화행 버스가 도착하여 정류장에 정차했는데 그 버스 속에서 김포 해병부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타고있는 해병들을 공수단 사병들이 끌어 내려서 집단으로 두들겨 패버렸다.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은 해병들은 김포의 본대에 돌아 가서 이 억울한 사실을 보고하고 소속 지휘관도 모르게 해병대 추럭에 해병들을 싣고 와서 김포공항 앞의 주점거리 일대에서 육군 사병들을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패기시작하여 큰 싸움으로 번져서 그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해병들은 육군 헌병과 육군 공수단 병력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추럭을 타고 김포의 해병부대로 돌아간 큰 사건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걸 보고 해병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썩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좋아했지만 실은 그렇지만 않았다. 해병대는 그때만 해도 너무 단순해서 이런 결과가 육군 수뇌부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생각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3. 국일관에서의 패 싸움
50년대에 해병대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 장안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종로의 "국일관"(지금은 헐려서 없음)에서 해병대 장교와 육군 장교 간의 싸움은 아주 유명했다. 캬바레인 "국일관"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육군 장교의 시비로 치고 박고하는 싸움이 해병대 장교들과 시작되었는 데 처음에 이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가 나중에 이 싸움에 합세한 해병대 민용식 소령의 날쎈 발차기 동작을 수반한 싸움 솜씨는 그가 혼자서도 육군 장교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해병대 장교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춤추러 왔던 민간인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랐었는데 이것이 크게 소문이 퍼져서 서울 장안 일대에 상당기간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육군을 때려 눕힌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여간 좋아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해병대 전투(3)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그때에 왜 그렇게 육군을 미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의 좌측 정면을 맡고있던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그 어려웠던, 평생 잊을 수없는 후퇴이동, 38도선 이북으로부터 2박2일 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 중에 우리가 겪은 고생때문에 아니었는가 나는 생각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빼어 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동부전선에서 육군의 작전통제하에 북한군을 소탕하는 작전 간 육군으로부터의 보급물자의 지원이 얼마나 나빴는지 우리 모두는 마치 거지 같은 몰골로 강원도의 산악지대의 엄동설한 속에서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우리의 몰골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지금 생각만해도 우리는 완전히 거지 꼴이었다. 따라서 육군에 대한 해병들의 원망도 크지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지났지만 작전통제권이 미 해병대로 이관된 후부터 미 해병대로부터의 풍부한 군수물자의 보급은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육군 속에서 전투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면에서도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러니 이것 역시 우리가 육군을 원망하고 싫어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해병들 간에 구전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사로운 이해 부족에서 오는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지만 육군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웃어 넘기거나 또는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은 못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때 우리는 이런 사건, 사실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자랑으로 삼고 있었으나 당한 육군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눈에 보이지 않은 감정의 대립이 후일(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해체의 사유의 한 몫을 점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풍조는, 무엇을 하건 해병대는 그런 육군에게 꼭 이겨야한다는, 심지어 싸움을 하드라도 꼭 이겨야하고 술을 마셔도 이겨야한다는 것 같은 강박관념은 당시의 우리의 선배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억지같은 논리는 지금 생각하면 우리 해병대는 너무나 철이 없었고 또한 순진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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