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아노 가요 모음 01. 9월의 노래 02. 가을을 남기고 간사람 03. 고향의 푸른 잔디 04. 그 날 05. 그대 그리고 나 06. 그대 변치 않는다면 07. 그저 바라볼 수만 있다면 08. 기다리는 마음 09. 꽃반지 끼고 10. 꽃반지 끼고 11. 나무와 새 12. 나와 같다면 13.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14.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15. 남포동 브루스 16.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17. 너를 사랑하고도 18. 눈이 내리네 19. 눈이 내리네 20. 당신만을 사랑해 21. 당신만을 사랑해 22. 당신은 모르실거야 23. 당신은 모르실거야 24. 돌아오지 않는 강 25. 떠나버린 가을 26. 립스틱 짙게 바르고 27. 미련(전영록) 28. 미워도 다시 한 번 29. 바람에 실려 30. 비와 외로움 31. 빗물 32. 빛과 그림자 33. 사랑-김하정 34. 사랑은 계절 따라 35. 사랑은 영원히 36. 사랑은 Andante 37. 사랑의 세레나데 38. 사랑이 저만치 가네 39. 사랑이여 다시 한 번 40. 사랑하는 당신이 41. 숙명 42. 슬픈 눈동자의 소녀 43. 실비 오는 소리 44. 아름다운 것들 45.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46. 여고 시절 47. 여고시절 (방) 48. 연인의 길 49. 열애 50. 옛 시인의 노래 51. 옛시인의 노래 52. 우정 53. 울지 않아요 54. 이 마음 다시 여기에 55. 이별 56. 이별 57. 장난감 병정 58. 저 높은 곳을 향하여 59. 제비 60. 진고개 신사 61. 첫사랑의 언덕 62. 타인의 계절 63. 타인의 계절 64. 파도 65. 파도 66. 하숙생 67. 하얀 손수건 68. 하얀 손수건 69. 하와이 연정 70. 한 사람을 위한 마음 71. 호반의 벤치
일요일, 3월 27, 2011
피아노 가요 모음
토요일, 3월 26, 2011
한국 국민들을 감동시킨 일본인 며느리
韓國 國民들을 감동시킨日本人 며느리! 효 실천 일본인 며느리의 '휴먼' 드라마 대가족 이끌며 농사 생계 챙겨 친정아버지 병들자 모셔와 돌아가 실때까지 병수발도.. 한 여인이 있다. 산도 낯설고 물도 낯선 이국 땅에 시집와 나이 든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3년 전부터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남편 을 대신해 갖은 농사를 지어가며 세딸을 모범생으로 키워내 고 있는 일본 태생의 이 여인. 국경을 넘은 지극한 효심과 헌 신적인 가족애로 주위를 감동시키고 있다. 멋진 한국 남성과 깊은 사랑에 빠졌을 뿐이었다. 먼저 한국으로 시집간 친구의 친구가 소개해 만난 한국 농촌 의 노총각이었다. 1년이 넘도록 몇십통의 편지가 대한해협을 넘나들었고, 꿈에 그리던 얼굴을 마주하려 한국과 일본을 오가기도 했다. 그렇게 미야자키 히사미(43)씨와 이진기(46)씨는 1997년 결혼에 골인했다. 일본 자동차회사에서 사무를 보던 일본 여성에게 강원도 양양 에서 의 농사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낯선 땅에서 시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과 믿음직한 남편의 사랑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는 세월이었다. 은별(9), 은솔(8), 은비(6) 딸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미야자키씨 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건 2004년. 하루 일을 마치 고 돌아온 남편이 갑자기 앓아누웠다. 힘겨운 농사일에 몸살인 줄로만 알았다. 복통과 고열, 구토에 시달 린 남편은 결국 서울아산병원까지 실려갔다. 진단 결과는 뇌수 막염 이었다. 열은 40도까지 치솟았고, 한달 넘게 의식을 잃은남편 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절망했으나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소 서툰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남편을 너무 좋아해서 결혼한 건데요. 아프니까 더 사랑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차분한 말투였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늙으신 시부모님과 어린 세 딸, 시력·청력을 잃은 남편을 돌봐야 하는 고행길이 펼쳐졌다. 남편이 일구던 느타리버섯 농장은 그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남편의 1급 장애인 생활보조금 등 한달에 100만원 정도를 군청에서 받았지만, 대가족을 이끌어야 할 여성 가장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5년 8월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쓰러 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동딸인 자신마저 한국으로 옮겨와 홀몸인 상태였다. 아버지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려니, 못 보고 못 듣는 남편은 물론 시부모님과 자식들이마음을 붙들어맸다. 결론은 “아버지를 모셔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한국 땅 양양의 딸 곁에서 다섯달의 여생을 평안히 마칠 수 있었다. 미야자키 히사미 ( 농협효행상 대상 수상자) 2007. 5.3일 오전 서울 농협중앙회 본사에서 만난 미야자키씨는 수줍게웃었다. 지역농협의 추천으로 그는 제12회 농협효행상 수상자가 됐다. 그는 여전히 남편 생각뿐이었다 지난해 300만원에서 3천만원 으로 늘어난 상금은, 남편이 편히 움직이며 생활할수 있는 시설을 집에 갖추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남편의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을 써서 대화해요. 효행상 받는다고 했더니, 남편이 ‘축하한다’고 했어요. ” 얼굴에 10년 전 새색시의 부끄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
금요일, 3월 25, 2011
이근식 예비역 해병 대령님의 블로그에서 퍼온글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게 되었는가? 海兵精神. by oldmarine 2008/02/29 10:22 marinekslee.egloos.com/8510607 덧글수 : 0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게 되었는가?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며 싫어했는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져 버렸을 지난 일들 일 수 있으나 오늘의 해병들에게 선배해병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당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자부심으로,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세하고 있었으나 부득기한 사실을 비하의 구실로 삼았던 오래 전의 우리들 자신이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해병들이 육군을 비하하고 싫어하게 된 무엇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중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여기에는 특히 우리의 형제 해병대인 미 해병대도 우리에게 미 육군을 Doggy Army라고 비하하여 부른 것도 한목했었다. 그 당시 한국 해병대는 초창기였는지라 미 해병대의 작전통제하에 상당 기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오늘날의 미 해병들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미 해병들은 우리를 진정 Brother Marine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를 여러모로 도와주었었다. 우리도 그들을 Big brother라고 부르고 환대했었다.
1951년 4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그 간의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한국 육군의 작전통제로부터 지휘체계가 변경되면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있게 된 후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일선 연대로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중에 있을 때 우리의 좌측방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에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사단장 S 소장)이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밀려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지 10여 분만에 어이없게 전선이 돌파당하여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의 급속한 돌파구 확장에 따르는 포위에 대비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에 의거 우리, 해병 제1연대는 2박2일 간(당시 필자는 제1대대 첨병소대장이었음) 38도선 이북으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우리가 평생 잊을래 잊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강행군을 계속하였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해병대 전투"(3): "해병 제1연대의 후퇴이동"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음.
그때의 해병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던 육군에 대한 원한 같은 것으로 인하여 육군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육군을 멸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전투지대내에서 발견되는 육군은 장교건 사병이건 모조리 포로로 취급하였다. 그것은 그런 육군을 우리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 감정이 당시의 그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들에 의해 구전되면서 더욱 과장되거나 심화되어 육군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으며 더욱이 그런 육군에는 무엇을 하건 이겨야한다는 선배들의 선동?도 여기에 크게 작용했음은 빼어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당시 우리 해병대는 대육군에 비하면 1개 연대 병력밖에 안되니 숫적인 열세를 이런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이었으며 후퇴이동 중 대대 첨병소대장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해병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순간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으나 다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않은 심정이다. 그때의 해병들은 지금 80대 전후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하여 그로 인하여 우리, 해병들이 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고 또한 우수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우물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하늘 전체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은 어리석은 생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육군은 어디까지나 대육군이기 때문이다. 수가 많으면 그 속에는 약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도 모르고 무턱대고 육군을 깔보거나 싫어하는 해병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날도 종종 보고 또한 그들에 대해서 듣게 되는데 이런 편협된 사고방식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어야 했다. 지금은 이래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거기에 합당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도 모르고 육군을 무조건 싫어하거나 깔본다는 것은 너무나 유아독존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하여 그들이 우리를, 해병대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하며 이는 오래 전의 일이니 이제는 그것이 부득기한 사실이었음을 이해하고 받아드려서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야한다.
50년대에 야기된 육군과의 주요 충돌사건 중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이 실례를 들 수 있다.
1. 열차 속에서의 난동
한국전쟁이 휴전(1953.7.27)된 후(1956년)에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었던 많은 고참 하사관(해병 1, 2기 및 해군 13,14기)들이 전역하고 귀향길에 올라 있을 때의 일이다. 이때 나는 진해에 있는 해병학교의 사관후보생 중대장 이었다. 어느날 교수부장(문희석 중령)을 수행하여 서울행 야간열차인 "통일호"를 탔다. 이때 군 전용열차는 "통일호"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육군 수송관의 해병대 소령이라는 특별 배려로 중령급 이상 장교에게 허용되는 침대칸을 배정 받았다.
침대칸에서 한참 자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해병대 소령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며 나를 환급히 찾는 다급한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왜 그러시요?"하고 대답했다. 일어나 보니 육군 수송관이었다.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열차 안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육군 사병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젔는데 해병대가 육군을 때려 눕히고 싸움을 말리던 헌병까지 두들겨 패서 열차안이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열차가 못가고 정차해 있으니 소령님 나와서 싸움을 좀 말려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이들이 조용히 돌아갈 리가 있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해병대 장교 정모를 쓰고, 물론 장교 약복을 입고 수송관을 따라서 사병칸에 가 보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 광경은 미국 서부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 같았다. 담배 연기까지 자욱했고 술병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나는 사병칸에 들어 서자마자 "왜들 자지않고 이렇게 시끄러워!"하고 이들의 기를 꺽기 위하여 우선 소리부터 질렀다. 그때 나는 26세의 나이였으며 태권도 유단자였다. 순간 조용해젔다. 그런데 뒷쪽에서 "뭐야!"하는 내 목소리보다 더 큰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선채로 그들을 노려봤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 "이 소령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하사관이었다. 이것이 신호나 된 듯 여기 저거서 "이 소령님 웬 일이십니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인사를 듣고도 나는 아무 소리 안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사실은 나는 그들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감격하여 그대로 서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일 누군가 "너는 뭐야!" 했으면 해병대 소령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강성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아마 살인까지 마다했을 지도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한국전쟁 중 소대장, 중대장할 때의 그 전투정신이 생생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해병대의 명예는 일순 간에 땅에 떨어져 버리고 똥이 되었을 것은 분명한 순간 이었다. 그리고 사태는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장교님이다" 하면서 이들은, 해병대 하사관들은 전부 아무 소리 안하고 자기들 자리로 돌아 갔다. 우리가 언제 싸움질 했나? 하는 그런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들은 역전의 용사답게 지난 날에 자기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전투를 한 그들의 상관을 비록 제대하고 귀향 중에 있었지만 존경하고 있었다. 오늘의 해병들도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이 참다운 가식이 없는 순수한 해병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병정신은 어떤 구호나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히 상관을, 또는 남을 위하는 양보이기도 하다. 이것이 참말로 내가 오늘의 해병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2. 육군 공수단 사병들과의 싸움
50년대의 해병들과 육군 공수단 사병들 간의 관계는 마치 견원지간의 사이 같았다. 때문에 부득기 충돌도 종종 피할 수 없이 있었다. 통상 그 시비는 영등포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소속된 군의 우월성의 자랑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도에 넘치게 되면 싸움으로 번졌다.
그날은 육군 공수단 소속 사병이 해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자기들의 김포공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공수단 본대에 보고한 후 보복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김포공항 앞 버스정류장에서 해병들이 탄 버스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영등포에서 강화행 버스가 도착하여 정류장에 정차했는데 그 버스 속에서 김포 해병부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타고있는 해병들을 공수단 사병들이 끌어 내려서 집단으로 두들겨 패버렸다.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은 해병들은 김포의 본대에 돌아 가서 이 억울한 사실을 보고하고 소속 지휘관도 모르게 해병대 추럭에 해병들을 싣고 와서 김포공항 앞의 주점거리 일대에서 육군 사병들을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패기시작하여 큰 싸움으로 번져서 그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해병들은 육군 헌병과 육군 공수단 병력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추럭을 타고 김포의 해병부대로 돌아간 큰 사건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걸 보고 해병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썩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좋아했지만 실은 그렇지만 않았다. 해병대는 그때만 해도 너무 단순해서 이런 결과가 육군 수뇌부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생각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3. 국일관에서의 패 싸움
50년대에 해병대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 장안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종로의 "국일관"(지금은 헐려서 없음)에서 해병대 장교와 육군 장교 간의 싸움은 아주 유명했다. 캬바레인 "국일관"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육군 장교의 시비로 치고 박고하는 싸움이 해병대 장교들과 시작되었는 데 처음에 이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가 나중에 이 싸움에 합세한 해병대 민용식 소령의 날쎈 발차기 동작을 수반한 싸움 솜씨는 그가 혼자서도 육군 장교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해병대 장교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춤추러 왔던 민간인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랐었는데 이것이 크게 소문이 퍼져서 서울 장안 일대에 상당기간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육군을 때려 눕힌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여간 좋아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해병대 전투(3)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그때에 왜 그렇게 육군을 미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의 좌측 정면을 맡고있던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그 어려웠던, 평생 잊을 수없는 후퇴이동, 38도선 이북으로부터 2박2일 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 중에 우리가 겪은 고생때문에 아니었는가 나는 생각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빼어 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동부전선에서 육군의 작전통제하에 북한군을 소탕하는 작전 간 육군으로부터의 보급물자의 지원이 얼마나 나빴는지 우리 모두는 마치 거지 같은 몰골로 강원도의 산악지대의 엄동설한 속에서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우리의 몰골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지금 생각만해도 우리는 완전히 거지 꼴이었다. 따라서 육군에 대한 해병들의 원망도 크지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지났지만 작전통제권이 미 해병대로 이관된 후부터 미 해병대로부터의 풍부한 군수물자의 보급은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육군 속에서 전투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면에서도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러니 이것 역시 우리가 육군을 원망하고 싫어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해병들 간에 구전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사로운 이해 부족에서 오는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지만 육군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웃어 넘기거나 또는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은 못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때 우리는 이런 사건, 사실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자랑으로 삼고 있었으나 당한 육군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눈에 보이지 않은 감정의 대립이 후일(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해체의 사유의 한 몫을 점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풍조는, 무엇을 하건 해병대는 그런 육군에게 꼭 이겨야한다는, 심지어 싸움을 하드라도 꼭 이겨야하고 술을 마셔도 이겨야한다는 것 같은 강박관념은 당시의 우리의 선배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억지같은 논리는 지금 생각하면 우리 해병대는 너무나 철이 없었고 또한 순진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게 되었는가?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며 싫어했는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져 버렸을 지난 일들 일 수 있으나 오늘의 해병들에게 선배해병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당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자부심으로,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세하고 있었으나 부득기한 사실을 비하의 구실로 삼았던 오래 전의 우리들 자신이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해병들이 육군을 비하하고 싫어하게 된 무엇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중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여기에는 특히 우리의 형제 해병대인 미 해병대도 우리에게 미 육군을 Doggy Army라고 비하하여 부른 것도 한목했었다. 그 당시 한국 해병대는 초창기였는지라 미 해병대의 작전통제하에 상당 기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오늘날의 미 해병들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미 해병들은 우리를 진정 Brother Marine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를 여러모로 도와주었었다. 우리도 그들을 Big brother라고 부르고 환대했었다.
1951년 4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그 간의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한국 육군의 작전통제로부터 지휘체계가 변경되면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있게 된 후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일선 연대로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중에 있을 때 우리의 좌측방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에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사단장 S 소장)이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밀려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지 10여 분만에 어이없게 전선이 돌파당하여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의 급속한 돌파구 확장에 따르는 포위에 대비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에 의거 우리, 해병 제1연대는 2박2일 간(당시 필자는 제1대대 첨병소대장이었음) 38도선 이북으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우리가 평생 잊을래 잊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강행군을 계속하였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해병대 전투"(3): "해병 제1연대의 후퇴이동"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음.
그때의 해병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던 육군에 대한 원한 같은 것으로 인하여 육군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육군을 멸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전투지대내에서 발견되는 육군은 장교건 사병이건 모조리 포로로 취급하였다. 그것은 그런 육군을 우리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 감정이 당시의 그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들에 의해 구전되면서 더욱 과장되거나 심화되어 육군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으며 더욱이 그런 육군에는 무엇을 하건 이겨야한다는 선배들의 선동?도 여기에 크게 작용했음은 빼어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당시 우리 해병대는 대육군에 비하면 1개 연대 병력밖에 안되니 숫적인 열세를 이런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이었으며 후퇴이동 중 대대 첨병소대장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해병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순간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으나 다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않은 심정이다. 그때의 해병들은 지금 80대 전후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하여 그로 인하여 우리, 해병들이 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고 또한 우수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우물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하늘 전체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은 어리석은 생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육군은 어디까지나 대육군이기 때문이다. 수가 많으면 그 속에는 약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도 모르고 무턱대고 육군을 깔보거나 싫어하는 해병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날도 종종 보고 또한 그들에 대해서 듣게 되는데 이런 편협된 사고방식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어야 했다. 지금은 이래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거기에 합당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도 모르고 육군을 무조건 싫어하거나 깔본다는 것은 너무나 유아독존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하여 그들이 우리를, 해병대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하며 이는 오래 전의 일이니 이제는 그것이 부득기한 사실이었음을 이해하고 받아드려서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야한다.
50년대에 야기된 육군과의 주요 충돌사건 중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이 실례를 들 수 있다.
1. 열차 속에서의 난동
한국전쟁이 휴전(1953.7.27)된 후(1956년)에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었던 많은 고참 하사관(해병 1, 2기 및 해군 13,14기)들이 전역하고 귀향길에 올라 있을 때의 일이다. 이때 나는 진해에 있는 해병학교의 사관후보생 중대장 이었다. 어느날 교수부장(문희석 중령)을 수행하여 서울행 야간열차인 "통일호"를 탔다. 이때 군 전용열차는 "통일호"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육군 수송관의 해병대 소령이라는 특별 배려로 중령급 이상 장교에게 허용되는 침대칸을 배정 받았다.
침대칸에서 한참 자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해병대 소령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며 나를 환급히 찾는 다급한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왜 그러시요?"하고 대답했다. 일어나 보니 육군 수송관이었다.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열차 안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육군 사병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젔는데 해병대가 육군을 때려 눕히고 싸움을 말리던 헌병까지 두들겨 패서 열차안이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열차가 못가고 정차해 있으니 소령님 나와서 싸움을 좀 말려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이들이 조용히 돌아갈 리가 있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해병대 장교 정모를 쓰고, 물론 장교 약복을 입고 수송관을 따라서 사병칸에 가 보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 광경은 미국 서부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 같았다. 담배 연기까지 자욱했고 술병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나는 사병칸에 들어 서자마자 "왜들 자지않고 이렇게 시끄러워!"하고 이들의 기를 꺽기 위하여 우선 소리부터 질렀다. 그때 나는 26세의 나이였으며 태권도 유단자였다. 순간 조용해젔다. 그런데 뒷쪽에서 "뭐야!"하는 내 목소리보다 더 큰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선채로 그들을 노려봤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 "이 소령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하사관이었다. 이것이 신호나 된 듯 여기 저거서 "이 소령님 웬 일이십니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인사를 듣고도 나는 아무 소리 안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사실은 나는 그들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감격하여 그대로 서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일 누군가 "너는 뭐야!" 했으면 해병대 소령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강성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아마 살인까지 마다했을 지도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한국전쟁 중 소대장, 중대장할 때의 그 전투정신이 생생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해병대의 명예는 일순 간에 땅에 떨어져 버리고 똥이 되었을 것은 분명한 순간 이었다. 그리고 사태는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장교님이다" 하면서 이들은, 해병대 하사관들은 전부 아무 소리 안하고 자기들 자리로 돌아 갔다. 우리가 언제 싸움질 했나? 하는 그런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들은 역전의 용사답게 지난 날에 자기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전투를 한 그들의 상관을 비록 제대하고 귀향 중에 있었지만 존경하고 있었다. 오늘의 해병들도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이 참다운 가식이 없는 순수한 해병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병정신은 어떤 구호나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히 상관을, 또는 남을 위하는 양보이기도 하다. 이것이 참말로 내가 오늘의 해병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2. 육군 공수단 사병들과의 싸움
50년대의 해병들과 육군 공수단 사병들 간의 관계는 마치 견원지간의 사이 같았다. 때문에 부득기 충돌도 종종 피할 수 없이 있었다. 통상 그 시비는 영등포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소속된 군의 우월성의 자랑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도에 넘치게 되면 싸움으로 번졌다.
그날은 육군 공수단 소속 사병이 해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자기들의 김포공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공수단 본대에 보고한 후 보복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김포공항 앞 버스정류장에서 해병들이 탄 버스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영등포에서 강화행 버스가 도착하여 정류장에 정차했는데 그 버스 속에서 김포 해병부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타고있는 해병들을 공수단 사병들이 끌어 내려서 집단으로 두들겨 패버렸다.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은 해병들은 김포의 본대에 돌아 가서 이 억울한 사실을 보고하고 소속 지휘관도 모르게 해병대 추럭에 해병들을 싣고 와서 김포공항 앞의 주점거리 일대에서 육군 사병들을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패기시작하여 큰 싸움으로 번져서 그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해병들은 육군 헌병과 육군 공수단 병력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추럭을 타고 김포의 해병부대로 돌아간 큰 사건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걸 보고 해병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썩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좋아했지만 실은 그렇지만 않았다. 해병대는 그때만 해도 너무 단순해서 이런 결과가 육군 수뇌부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생각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3. 국일관에서의 패 싸움
50년대에 해병대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 장안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종로의 "국일관"(지금은 헐려서 없음)에서 해병대 장교와 육군 장교 간의 싸움은 아주 유명했다. 캬바레인 "국일관"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육군 장교의 시비로 치고 박고하는 싸움이 해병대 장교들과 시작되었는 데 처음에 이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가 나중에 이 싸움에 합세한 해병대 민용식 소령의 날쎈 발차기 동작을 수반한 싸움 솜씨는 그가 혼자서도 육군 장교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해병대 장교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춤추러 왔던 민간인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랐었는데 이것이 크게 소문이 퍼져서 서울 장안 일대에 상당기간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육군을 때려 눕힌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여간 좋아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해병대 전투(3)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그때에 왜 그렇게 육군을 미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의 좌측 정면을 맡고있던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그 어려웠던, 평생 잊을 수없는 후퇴이동, 38도선 이북으로부터 2박2일 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 중에 우리가 겪은 고생때문에 아니었는가 나는 생각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빼어 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동부전선에서 육군의 작전통제하에 북한군을 소탕하는 작전 간 육군으로부터의 보급물자의 지원이 얼마나 나빴는지 우리 모두는 마치 거지 같은 몰골로 강원도의 산악지대의 엄동설한 속에서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우리의 몰골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지금 생각만해도 우리는 완전히 거지 꼴이었다. 따라서 육군에 대한 해병들의 원망도 크지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지났지만 작전통제권이 미 해병대로 이관된 후부터 미 해병대로부터의 풍부한 군수물자의 보급은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육군 속에서 전투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면에서도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러니 이것 역시 우리가 육군을 원망하고 싫어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해병들 간에 구전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사로운 이해 부족에서 오는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지만 육군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웃어 넘기거나 또는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은 못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때 우리는 이런 사건, 사실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자랑으로 삼고 있었으나 당한 육군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눈에 보이지 않은 감정의 대립이 후일(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해체의 사유의 한 몫을 점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풍조는, 무엇을 하건 해병대는 그런 육군에게 꼭 이겨야한다는, 심지어 싸움을 하드라도 꼭 이겨야하고 술을 마셔도 이겨야한다는 것 같은 강박관념은 당시의 우리의 선배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억지같은 논리는 지금 생각하면 우리 해병대는 너무나 철이 없었고 또한 순진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목요일, 3월 24, 2011
수요일, 3월 23, 2011
가혹 행위에 '곪아터진' 해병대 전통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로 드러난 해병대 모 연대 선임병들의 그릇된 후임병 관리 문화는 구타·가혹행위에 관용적인 해병대 특유의 문화와 지휘감독자의 관리 부실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24일 인권위가 공개한 해병대 모 연대 내 가혹행위를 보면, 청소 불량·암기 소홀·군기 유지 등의 이유로 철봉 매달리기·엎드려뻗쳐 등의 얼차려부터 상습 구타, 이른바 ‘악기 바리’로 불리는 음식물 강제 취식 등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수시로 폭행 및 가혹행위를 당한 한 사병은 행정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구두 훈계만 이뤄져 이후 더욱 심한 폭행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결국 이 피해 사병이 기절해 의무실에 실려가고 나서야 가해 사병에 대해 영창 등의 징계가 내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사병은 선임 병사의 기수와 조리식단 메뉴를 외우지 못하고, 빵 5개를 제한 시간 내에 먹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구타를 당해 응급실 치료까지 받았다. 하지만 행정관은 고소하지 말라며 이 사병을 설득하고 가해자에게는 영창처분만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대부분 가해자는 인권위 조사에서 “후임병 시절 유사한 구타·가혹행위를 당했고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을 ‘해병대 전통’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등 가혹행위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인권위는 전했다.
인권위는 이어 폭행사건을 상급자에게 발설할 경우 기수 열외 등 2차 피해를 주는 폐쇄적 조직 문화, 지휘·감독자들이 부대의 명예훼손과 불이익을 우려해 ‘구타에 대해 엄정히 사법처리하라’는 관련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경미하게 처리하려는 경향을 해병대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2010년 의무대 환자 발생보고서를 보더라도 고막 천공(구멍이 뚫리는 것) 30여건, 비골ㆍ늑골 골절, 대퇴부파열 등 타박상 기록이 250여건에 이르지만 발병 경위 등은 부실하게 기록돼 있었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인권위 관계자는 “연평도 포격 사태 때 해병대가 용기있는 행동으로 국민에게 많은 신뢰를 줘 젊은이들도 앞다퉈 해병대에 지원하는 상황에서, 이런 발표를 하게 돼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부대원 상호 간 존중과 소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해병대 전통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24일 인권위가 공개한 해병대 모 연대 내 가혹행위를 보면, 청소 불량·암기 소홀·군기 유지 등의 이유로 철봉 매달리기·엎드려뻗쳐 등의 얼차려부터 상습 구타, 이른바 ‘악기 바리’로 불리는 음식물 강제 취식 등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수시로 폭행 및 가혹행위를 당한 한 사병은 행정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구두 훈계만 이뤄져 이후 더욱 심한 폭행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결국 이 피해 사병이 기절해 의무실에 실려가고 나서야 가해 사병에 대해 영창 등의 징계가 내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사병은 선임 병사의 기수와 조리식단 메뉴를 외우지 못하고, 빵 5개를 제한 시간 내에 먹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구타를 당해 응급실 치료까지 받았다. 하지만 행정관은 고소하지 말라며 이 사병을 설득하고 가해자에게는 영창처분만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대부분 가해자는 인권위 조사에서 “후임병 시절 유사한 구타·가혹행위를 당했고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을 ‘해병대 전통’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등 가혹행위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인권위는 전했다.
인권위는 이어 폭행사건을 상급자에게 발설할 경우 기수 열외 등 2차 피해를 주는 폐쇄적 조직 문화, 지휘·감독자들이 부대의 명예훼손과 불이익을 우려해 ‘구타에 대해 엄정히 사법처리하라’는 관련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경미하게 처리하려는 경향을 해병대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2010년 의무대 환자 발생보고서를 보더라도 고막 천공(구멍이 뚫리는 것) 30여건, 비골ㆍ늑골 골절, 대퇴부파열 등 타박상 기록이 250여건에 이르지만 발병 경위 등은 부실하게 기록돼 있었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인권위 관계자는 “연평도 포격 사태 때 해병대가 용기있는 행동으로 국민에게 많은 신뢰를 줘 젊은이들도 앞다퉈 해병대에 지원하는 상황에서, 이런 발표를 하게 돼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부대원 상호 간 존중과 소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해병대 전통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해병대의 미래가 시작되는 이곳에서....
운영자
2011.03.18 10:28:37
요 근래 매스컴에 해병대가 많이 타면서 특히 브라운관에 자주 비춰졌던 이 장면... 기억하세요?
바로 해병대 교육훈련단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모습이랍니다. 오늘은 교육훈련단에서 시작되는 해병대 신병훈련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해병대 교육훈련단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모습이랍니다. 오늘은 교육훈련단에서 시작되는 해병대 신병훈련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해병이 되기 위해서는 장교, 부사관, 병 구분 없이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이 해병대 교육훈련단이죠! 특히 신병 양성교육 과정은 가입소 1주 후 본격적으로 6주동안 체계적인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즉각적으로 전투임무수행이 가능한 전투원 육성'을 목표로 진행됩니다.
가입소 1주 동안은 실질적인 훈련에 앞서 준비하는 단계로 신체검사와 피복을 지급 받습니다! 그리고 귀가심의를 통해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과 신체가 준비된 자만이 이발을 한 후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을 신병교육대로 입소하게 되는거죠~
처음 1주차는 '군 기본자세 완성'에 중점을 두고 교육에 임합니다. 군인복무규율, 안보교육 등 정신교육에 중점을 두고 교육을 하여 육체적 훈련을 받기 전 군인, 그리고 해병으로서의 강한 정신 무장을 하는거죠~
2주차는 '단결심 배양'에 목표를 두고 해병대 관련 과목 위주로 진행된답니다. 해병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KAAV에 대해 배우고 직접 탑승도 하고, 공수기초훈련과 해병대 훈련하면 딱 떠오르는 '고무보트 머리에 이고 뛰어다니는' IBS 훈련도 2주차 훈련 중의 일환이고요.
그리고 해병대하면 역시...상륙이죠!?
상륙을 하려면 수영은 필수! 신병들은 전투수영을 배웁니다. 수영을 못하는 훈련병들도 훈련기간이 끝나면 문제 없이 전투적으로 적진을 향해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갈 수 있게 되죠! ^^;
상륙을 하려면 수영은 필수! 신병들은 전투수영을 배웁니다. 수영을 못하는 훈련병들도 훈련기간이 끝나면 문제 없이 전투적으로 적진을 향해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갈 수 있게 되죠! ^^;
3주차에는 '사격능력 배양'을 목표로 이제 드디어 많은 신병들이 생에 처음으로 총을 쏠 기회를 맞이합니다. 신병들은 K-2를 이용한 사격을 하게 되며 영점사격부터 해서 연습사격, 기록사격, 그리고 야간사격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안전이 최우선시 되기 때문에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한답니다.
사격훈련이 끝나면 4주차에는 그 기본을 바탕으로 '전투기술 습득'을 위해 유격훈련과 야지적응력을 높이게 됩니다. 특히 레펠훈련은 유격훈련의 백미로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되죠. 물론 레펠 전의 PT체조는 지옥이지만요 ^^;
또한, K-3, K-201 등 공요화기 사격 훈련과 함께 수류탄 투척훈련도 실시하여 수류탄의 위력을 직접 체험하게 된답니다! 대단하죠? 물기둥이 솟아오르면서 땅이 흔들흔들 한답니다.
드디어 교육훈련의 하이라이트, 5주차 '극기주'까지 왔습니다. 극기주에는 '극기심 함양'을 목표로 전투체력을 완성하는 훈련이 이뤄집니다.
어떠한 극한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력과 전투력을 배양하기 위해 목봉훈련, 각개전투, 화생방, 시가지 전투, 천자봉 행군을 실시하게 되죠. 평소보다 훈련의 강도는 훨씬 강해지고, 수면시간은 짧아지고, 배식량도 줄어듭니다. 훈련병들은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며 악조건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천자봉 행군을 마친 뒤에는 뜻 깊은 마침표가 찍혀지죠. 드디어 오른쪽 상의에 '빨간명찰'이 달립게 됩니다.
빨간명찰을 가슴에 달고 마지막 6주차에는 '기초전술 완성'에 중점을 두고 교육이 진행되며 종합평가 및 교육사열을 통해 신병들의 전투기술능력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끝났다!!! 하고 수료식을 실시함으로써 드디어 자랑스러운 해병대원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곧 실무로 배치되어 '훈단이 끝이 아니었구나..' 혹은 '훈단에서 동기들과 훈련 받을 때가 좋았지...' 라고 생각하는 날이 금.방. 찾아오게 된답니다 ^^ <해병대블로그 날아라마린보이>
그리고 드디어 끝났다!!! 하고 수료식을 실시함으로써 드디어 자랑스러운 해병대원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곧 실무로 배치되어 '훈단이 끝이 아니었구나..' 혹은 '훈단에서 동기들과 훈련 받을 때가 좋았지...' 라고 생각하는 날이 금.방. 찾아오게 된답니다 ^^ <해병대블로그 날아라마린보이>
화요일, 3월 22, 2011
신병 1137기 해병대 교육훈련단 입소식
신병1137기 - 1주차 신병훈련
2011/03/22 10:44 | Posted by 해피마린신병 1137기가 드디어 가입소 기간을 거치고 해병대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였습니다.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해병대 신병교육대 입소식을 하였습니다.
"선서!" 보통 선서는 한 기수의 신병 중 외적자세가 우수한 신병이 대표자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요.
1137기 신병들 중에서는 외적자세가 우수하면서도 가장 나이가 많은 김태평 신병이 대표자로
나서 선서를 하였습니다.
필승! 선서가 끝나고 전 장병들이 일제히 경례를 하며 선서를 마쳤습니다.
신병들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앞으로 다가올 6주간의 훈련과 군생활에 대한 각오와 비장함이 비춰집니다.
김태평 신병의 경례하는 모습에서도 태극기 아래 대한민국 국방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묻어져 나옵니다.
입소식이 끝나고 훈련 1주차의 첫번째 교육인 역사관 관람을 위해 해병대 교훈단 내에 있는 역사관으로 향하는 1137기 신병들입니다.
훈련도 훈련이지만 우선은 해병대의 역사와 정신을 배워 가슴에 새겨놔야 나중에 훈련을 해도 더 열정적으로 힘들어도 이겨내며 견뎌낼 수 있겠죠?
결코 짧지 않은 62년동안의 해병대 선배님들의 역사적인 발자취를 보고 느끼며 강인한 해병 정신을 고취하였습니다.
역사관 관람을 마친 후 강당에 모여 화생방 교육을 받았습니다. 최근 북한의 연이은 도발과 위협에 화생방 공격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몇 주 뒤면 직접 방독면을 쓰고 화생방 훈련을 받을텐데 그 전에 열심히 공부하여 쓰디쓴 화생방 가스를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1137기 신병들의 1주차 훈련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훈련을 앞둔 신병 1137 모두에게 무운과 건투를 기원합니다. 다음 2주차 훈련에는 IBS훈련과 KAAV 탑승훈련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일요일, 3월 20, 2011
[ 인터뷰 ] 兵130期 홍사덕 의원
작성: Republic of Korea Marine Corps 대한민국 해병대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오전 8:43
2010-12-04 © 중앙일보
"150발 맞았으면 300발 쏘는 게 해병대 전통이다."
"북한의 포격 직후 대통령으로 하여금 '확전하지 말고 상황을 잘 관리하라'고 말씀하도록 한 청와대와 정부 내 개자식들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다." 북한의 연평도 무력도발 다음 날 해병 130기 출신인 6선의 한나라당 홍사덕(67·대구 서구) 의원 발언이 장안에 화제가 됐다.
홍 의원은 "대통령께서 시간이 지난 다음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몇 배의 보복을 하도록 했지만, 처음에 주변에서 잘못 오도했던 참모들은 이참에 청소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었다. 그는 특히 "해병은 절대로 공매(헛된 매)를 맞는 군대가 아니다"라며 "몇 배의 보복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뒀어야 했다"고 강조해 의원 사무실에 격려 전화가 줄을 잇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홍 의원으로부터 '해병정신'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 '개자식'이란 용어까지 썼다.
"별별 험한 말을 다 해도 상관이 부하한테 야단칠 때도 우리 해병 시절에는 그 말만은 안 썼다. 금기로 돼 있었다. 온갖 흉악한 말을 다 해도 그 말을 입에 담으면 동기 사이에선 바로 결투였다. 신병훈련소부터 해병대 특유의 뭐가 있는데, '지금부터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로 시작하지만 개자식이라는 말만은 못 쓰게 돼 있었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그랬다."
- 그런데 왜 썼나.
"150발을 맞았으면 300발 쏘는 게 해병대 전통이다. 소대장·중대장한테 맡기든, 사령관한테 맡기든 그게 전통이다. 왜 못 하게 만들었나, 그게 진짜 화가 난 이유다. 내가 말수 많은 사람도 아니고, 험한 말 쓰는 사람도 아니다. 상당히 위험한 인계점까지 가 있는 상황에서 화력이나 장비를 이런 식으로 해놓는 것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거기(연평도)에 주둔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죽으라고 하는 것은 안 되지 않느냐.
해병대가 거기에 있는 이상 북한4군단은 절대 꼼짝을 못 한다. 진짜 북한의 옆구리 내지 목에 칼을 들이댄 형세로 가 있는 거다. 해병대니까, 그게 가능한 거다. 한국전 때 기억이 있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그렇게 대비를 해온 거다. 해병대가 저렇게 맥없이 당하고, 일본에서도 '한국군 약하다' 망신당하면서 다른 군 사기는 저절로 떨어지는 거다. 그래서 화가 난 거다."
-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걸로 본 것 같다.
"그것은 군 통수, 군령 지휘계통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잘 알 거다. 반성하라는 의미로 그렇게 험한 말을 한거다."
- 말하길 잘했다고 보나.
"충격 주는 데는 성공했다고 본다. 어느 의미에서 보면 대한민국 사활의 문제 아니냐. 그래서 작심하고 얘기한 거다."
- 앞으로 달라질 것으로 보나.
"우리 해병대에서는 연평도나 백령도에 있는 병력은 사실은 개전 시 죽을 각오를 하고 주둔해 있는 거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달라는 거다. 개전 시에 거기서 살아남을 확률이 뭐 그리 크겠냐. 그래도 해병대 전통대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달라는 거다."
- 앞으로 이 사안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소위 게임이론, 1970년대 이후 정치학에서 게임이론이 많이 발전, 숙성됐다. 관대한 사람과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의 게임에서 승률을 제일 높이는 방법은 로버트 엑슬로드가 개발한 '팃포탯(tit-for-tat: 반드시 보복하기)' 전략이다. 처음에는 한 번 용서하고 관용을 베푼 다음, 그 다음에는 상대가 하는 대로 맞대응하는 방식이다.
대북 전략은 기본적으로 팃포탯 전략을 택해야 한다. 이 정부 들어서서 첫 번째 단계, 먼저 한 번 베푸는 단계를 생략했던 게 유감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다. 또 하나는 프랑스 클레망소(1917~20) 총리가 한 예기인데, 전쟁이라는 것은 군인과 장군들한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일이다. 전쟁은 정치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염두에 두고 구상을 잡아야 한다."
- 현 정부 초기에 베푸는 단계를 생략한 게 유감이라는 것은.
"메시지가 분명해야 한다. '한 번 베풀고 용서한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고약하게 나올 때는 바로 단호히 응징한다.' 이 메시지를 분명하게 했어야 한다는 거다. 메시지가 분영해야 승률이 놓은 거다."
- 천안함 사건으로 그 단계를 한 번 거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상대가 용서받은 걸로 생각하느냐 그걸 봐야 한다. 그런 메시지가 전달됏을지에 대해선 면밀히 검토해 봐야 한다."
- 해병대를 지원한 계기는.
"대학등록금도 없었고, 기왕 군대 갈 바에야 해병대를 가자. 그냥 그렇게 단순하고 소박한 거였다. 거창한 건 없었다."
- 해병대 가면 고생한다는 이미지 있지 않았나.
"하여튼 서울대생 중 사병으로선 내가 1호였다. 사람들이 좀 놀랐더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극한점까지 가서 그걸 견뎌내야 신병훈련소를 마칠 수 있는 곳이었으니까.
내가 6월 22일 입대했다. 그런데 군복 입기 전 4시간 만에 해병대를 만들어내더만. 3시간 40분 구보를 시키고 나서 수돗물이 안 나오더라. 결국 훈련소장 막사 앞 30평쯤 되는 연못에 400명이 달려들어 마셨다. 연못이 반으로 주는 것 같더라 그 순간 해병이 된 거다. 그게 말하자면 시작이다. 장구벌레 떠다니고, 이끼 떠 있는 연못인데, 다른 데 물이 없으니까."
- 아들(홍재선)도 702기로 해병대 복무를 했는데.
"그놈도 뭐 비슷했다. '기왕 갈 거면 해병대 간다' 그랬다. 신병훈련소를 1등으로 졸업하는 바람에, 부모로서 초청받아서 훈련소 가서 상 받는 것을 봤다. 높은 놈 자식은 최전방 보내는 게 전통이어서 훈련소에서 바로 연평도로 가서 거기에서 3년 복무한 뒤 제대했다."
- 홍 의원은 어디서 복무했나.
"당시로선 내가 큰 키였다. 그래서 나는 사령부 의장대에 있었다. 군기가 제일 센 데다."
- 그간 해병대에 대해 우리 사회가 큰 관심을 가질 계기가 없었다.
"한국전 때 정말로 어려운 전투는 예외 없이 해병대가 맡았다. 통영·인천 상륙작전, 도솔산 전투는 물론 양구 김일성 고지 탈환작전은 미 해병대도 못 했던 것을 우리가 해냈다. 북한 인민군이건, 중공군이건 해병대가 떴다 하면 실제 벌벌 떨었다. 정말 지독하게 싸웠으니까.
목표가 정해지면 반드시 해냈다. 그 결과 서해 5도에 해병대가 둥지를 트니까 불과 4000, 5000명 때문에 1개 군단(북한 4군단)이 거기 묶여 꼼짝을 못 하고 있다. 해병대니까 그렇다. 그런데 백령도 가서 내가 확인을 했는데, 한국전 때 쓰던 탱크를 고정시켜 아예 대포만 쓴다고 하더라. 포병을 강화해 달라고 내가 국방장관한테 부탁도 했었다."
- 해병대 후배, 해병대에 지원코자 하는 젊은이에게 조언한다면.
"해병이 된다는 것은, 나중에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남는 장사라는 걸 내가 보증하겠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포기하거나 무릎 꿇지 않는 근성, 그 해병정신을 갖게 된다."
성시윤 기자, copipi@joongang.co.kr
목요일, 3월 17, 2011
이재오 “해병대 독립과 지원 필요하다”
이재오 특임장관은 16일 “해병대를 제4군으로 독립시키고 병력도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 장관은 이날 포항 해병대1사단을 방문해 군 관계자로부터 군 현황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해병대 독립 관련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상태로 앞으로 해병대 독립과 각종 지원 방안이 추진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또 “개인적으로 해병대 병력을 3만명 이상으로 늘리고 현재 미흡한 점이 있는 각종 보훈 등 지원체계도 정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힘들더라도 장관 중에 해병대 팬이 있다는 것도 기억해 달라”고 강조했다.
이 장관은 이어 장병 1천500여명을 대상으로 안보를 주제로 한 특강을 통해 “북한은 6.25전쟁 이후 셀수없을 만큼 정전협상을 위반한 것도 모자라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자행하고 있다”며 “평화와 직결되는 안보는 곧 힘이며 해병대는 그 힘의 기본”이라고 말했다.
또 “6.25때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결정적인 것이 바로 낙동강전투”라며 “선배 군인들이 목숨을 바쳐 지킨 이 지역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여러분이 자랑스럽다”고 치켜세웠다.
그는 “우리가 북한보다 우월한 가장 큰 세가지 이유는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것과 민주주의 체제, 그리고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이라며 “이것을 수호하는 최첨병으로 국민들에게 존중받고 신뢰받는 해병대가 돼 달라”고 당부했다.
이 장관은 이어 해병대 전투교육과 장비견학을 한 뒤 높이 10m의 공수모형탑에서 직접 뛰어내리는 체험훈련을 해 눈길을 끌었다.
이 장관은 이에앞서 오전에는 포항시 북구에 있는 특성화고인 포항여자전자고를 방문해 1학년생 300여명을 대상으로 특강을 통해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앞으로 특성화고를 나온 학생들은 무조건 100% 취업하고 또 직장에 다니면서 원하는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목표”라며 정부의 특성화고 지원과 육성 의지를 피력했다.
이어 학교 관계자와 이 학교 여자축구부에 활약하고 있는 U-17 여자축구 월드컵 우승주역인 김민아, 오다혜 선수와 함께 교내식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오찬도 함께 했다.
이 장관의 포항방문은 천안함 폭침 1주년을 앞두고 안보의식을 고취하고 정부의 특성화고 육성 등 교육정책 지원과 정착을 위해 마련됐다.
연합뉴스
토요일, 3월 12, 2011
박 정희 대통령의 뇌물
故 박 정희 대통령의 뇌물
故 박 정희 대통령의 뇌물
(맥도널드 더글라스社 중역의 증언)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
되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 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 자동소총" 이었다.
한국이 사용하는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 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社 였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 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
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
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는(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중역) 대통령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 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 진 서류 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책상 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 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더운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 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
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러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 사에서 온 데이빗 심슨 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 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
에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
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 것은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 하나면 바랄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 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 동안 에어컨을 트는 게 어떻
겠나?" 나는 그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 .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방문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
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
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 ."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 정희 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
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거요?"
"각하, 맞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오. 내 돈
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 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 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
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
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 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나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 번 둘러
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 당시 더글라스 맥도날드사의 중역 / 데이빗 심슨 올림 =
= 옮긴 글=
故 박 정희 대통령의 뇌물
(맥도널드 더글라스社 중역의 증언)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
되었고, 한국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리는 대가로 많은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의 지원을 미국으로 부터 이전을 받게 된다.
그 지원중의 하나가 "M-16 자동소총" 이었다.
한국이 사용하는 무기는 단발식 카빈 소총으로서 M-16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는, 그야말로 장난감과 같은 수준의 무기였었고 우리는
그런 무기를 들고 남북대치 상황을 견디어 내어야만 했었다. 한국이
월남전에 군사를 파병하는 조건으로 얻을 수 있었던 M-16의 제조
수출업체는 맥도날드 더글라스社 였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의 수출 건을 따내게 된 뒤, 한국
을 방문한 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한 중역은 자신들의 무기를 수입
해주는 국가를 찾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게 된다.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것도 너무도 더웠던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나는(맥도날드 더글라스社의 중역) 대통령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박정희의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 하게 된다.
그리고 비서관이 열어주는 문안의 집무실의 광경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만들었었다.
커다란 책상위에 어지러이 놓여 진 서류 더미 속에 자신의 몸보다
몇 배는 더 커 보이는 책상 위에 앉아 한손으로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남은 한손 으로는 부채질을 하면서 더운 날씨를 이겨내고
있었던 사람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의 대통령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였었다.
아무리 가난한 국가라지만 도저히 대통령이라고 생각하기 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의 모순이 내안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손님
이 온 것을 알고 예의를 차리기 위해 옷걸이에 걸린 양복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러닝차림으로 집무를 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미국 맥도널드 사에서 온 데이빗 심슨 씨입니다." 비서가 나를
소개 함과 동시에 나는 일어나 대통령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먼 곳
에서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소, 앉으시오." 한여름의 더위 때문인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긴장 탓인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굳게 매어
진 넥타이로 손이 가고 있음을 알았다.
"아, 내가 결례를 한 것 같소이다. 나 혼자 있는 이 넓은 방에서 그것도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어컨을 튼다는 것은 큰 낭비인 것
같아서요. 나는 이 부채 하나면 바랄게 없지만 말이오. 이 뜨거운 볕
아래서 살 태우며 일하는 국민들에 비하면 나야 신선놀음 아니겠소."
"이보게, 비서관! 손님이 오셨는데 잠깐 동안 에어컨을 트는 게 어떻
겠나?" 나는 그제야 소위 한나라의 대통령 집무실에 그 흔한 에어컨
바람 하나 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만나봤던 여러 후진국의 대통령과는 무언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 . 나는 그의 말에 제대로
대꾸할 수 없을 만큼 작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네. 각하." 비서관이 에어컨을 작동하고 비로소 나는 대통령과
방문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나는, 내가 한국
을 방문한 목적을 그에게 이야기를 얘기했다.
"각하, 이번에 한국이 저희 M-16소총의 수입을 결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한국의 국가방위에 크게 도움이 되었
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희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 . ." 나는 준비해온
수표가 든 봉투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무엇이오?" 그(박 정희 대통령)는 봉투를 들어 그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흠. 100만 달러라. 내 봉급으로는 3대를 일해도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구려." 차갑게만 느껴지던 그의 얼굴에 웃음
기가 머물렀다. 나는 그 역시 내가 만나본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실망이 처음 그에 대해 느꼈던 왠지 모를 느낌이 많이 동요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각하! 이 돈은 저희 회사에서 보이는 성의입니다, 그러니 부디.."
대통령은 웃음을 지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하나만 물읍시다."
"예, 각하."
"이 돈 정말 날 주는 거요?"
"각하, 맞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소."
"네, 말씀하십시오. 각하."
그는 수표가 든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되돌아온 봉투를 보며 의아해하고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말했다. "자, 이돈 100만 달러는 이제 내 돈이오. 내 돈
이니까 내 돈을 가지고 당신 회사와 거래를 하고 싶소. 지금 당장
이 돈의 가치만큼 총을 가져오시오. 난 돈 보다는 총으로 받았으면
하는데, 당신이 그렇게 해주리라 믿소." 나는 왠지 모를 의아함에
눈이 크게 떠졌다.
"당신이 나에게 준 이 100만 달러는 내 돈도 그렇다고 당신 돈도
아니오. 이 돈은 지금 내 형제, 내 자식들이 천리 타향에서 그리고
저 멀리 월남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 내 아들들의 땀과 피와
바꾼 것이오. 그런 돈을 어찌 한 나라의 아버지로서 내 배를 채우
는데 사용할 수 있겠소." "이 돈은 다시 가져가시오. 대신 이 돈만큼
의 총을 우리에게 주시오."
나는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어나서 그에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반드시 100만 달러의 소총을 더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 나는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그의 웃음을 보았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아닌 한 아버지의 웃음을. .
그렇게 그에게는, 한국의 국민들이 자신의 형제들이요 자식들임을
느꼈다. 배웅하는 비서관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을 다시 한 번 둘러
본 나의 눈에는 다시 양복저고리를 벗으며 조용히 손수 에어컨을
끄는 작지만 너무나 크게 보이는 참다운 한나라의 대통령으로
보였다.
나는 낯선 나라의 대통령에게 왠지 모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 당시 더글라스 맥도날드사의 중역 / 데이빗 심슨 올림 =
= 옮긴 글=
국회 해병대전우회 회장 취임
국회 해병대전우회 회장 취임
강석호 국회의원, 24일 해병 출신 의원과 보좌진 등 회원 추대 받아
강석호 국회의원(한나라당, 영양․영덕․봉화․울진)이 대한민국 국회 해병대전우회 회장에 취임했다.
강의원은 24일 저녁 6시 30분 여의도에서 이화수․김재윤 의원 등과 보좌진,국회사무처 직원, 국회 출입 기자를 포함한 회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취임식에서 회장에 올랐다.
강의원은 취임사를 통해 "북한의 도발을 계기로 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시점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해병대에 몸담아 국방의 의무에 임했다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국회와 회원 모두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이날 취임식에서 앞으로 해병대 독립 법안과 해병대회관 건립, 추모비 건립을 위한 연평도 방문, 4군 체제 확립 등 해병대의 4대 당면 현안을 집중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대한민국 국회 해병대전우회는 지난해 결성됐으며 전현직 국회의원과 보좌진 등 회원 7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태우 기자(ltw0303@hanmail.net)
강석호 국회의원, 24일 해병 출신 의원과 보좌진 등 회원 추대 받아
강석호 국회의원(한나라당, 영양․영덕․봉화․울진)이 대한민국 국회 해병대전우회 회장에 취임했다.
강의원은 24일 저녁 6시 30분 여의도에서 이화수․김재윤 의원 등과 보좌진,국회사무처 직원, 국회 출입 기자를 포함한 회원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취임식에서 회장에 올랐다.
강의원은 취임사를 통해 "북한의 도발을 계기로 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시점에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해병대에 몸담아 국방의 의무에 임했다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국회와 회원 모두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참석자들은 이날 취임식에서 앞으로 해병대 독립 법안과 해병대회관 건립, 추모비 건립을 위한 연평도 방문, 4군 체제 확립 등 해병대의 4대 당면 현안을 집중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대한민국 국회 해병대전우회는 지난해 결성됐으며 전현직 국회의원과 보좌진 등 회원 7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태우 기자(ltw0303@hanmail.net)
금요일, 3월 11, 2011
육사교장 김충배 중장의 편지
김충배의 '육사교장의 편지'
* 다음은 2004년 11월 22일 김충배 육사교장이 교내강당에서 있었던 "생도와의 대화"시간에 생도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으로, 근래 인터넷 상에서 '육사교장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코리안 광부 만세!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 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 다음은 2004년 11월 22일 김충배 육사교장이 교내강당에서 있었던 "생도와의 대화"시간에 생도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으로, 근래 인터넷 상에서 '육사교장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 들이여!
여러분들은 5,60대가 겪은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대들은 조국을 위하여 과연 얼마만큼 땀과 눈물을 흘렸는가?
지금 여러분들이 누리는 풍요로움뒤에는
지난날 5,60대들의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는 것을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5.16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만약 그들을 인정한다면
아시아,또는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은 상황이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 때 미국은 주던 원조도 중단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존 에프 케네디,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태평양을 건너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었다. 가난한 한국에 돈 빌려줄 나라는지구상 어디에도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공산국 동독과 대치한 서독에 돈을 빌리려 대사를 파견해서 미국의 방해를 무릅쓰고1억 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당시 우리는 서독이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잡혔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그들 중에는 정규 대학을 나온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면접 볼 때 손이 고와서 떨어질까 봐 까만 연탄에 손을 비비며 거친 손을 만들어 면접에 합격했다.
서독 항공기가 그들을 태우기 위해 온김포공항에는 간호사와 광부들의 가족, 친척들이 흘리는 눈물로바다가 되어 있었다.
낯선 땅 서독에 도착한 간호사들은 시골병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말도 통하지 않는 여자 간호사들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병들어 죽은사람의 시신을 닦는 일이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콜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닦았다. 하루종일 닦고 또 닦았다.
남자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그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 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 캐는 광부 일을 했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여자 간호사와 남자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해서 부쳐진 별명이 '코리안 엔젤'이라고 불리었다.
몇 년 뒤 서독 뤼브케 대통령의 초대로 박 대통령이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에게 대통령 전용기는 상상할 수도 없어 미국의 노스웨스트항공사와 전세기 계약을 체결했지만 쿠데타군에게 비행기를 빌려 줄 수없다는 미국 정부의 압력 때문에 그 계약은 일방적으로 취소되었다.
그러나 서독정부는 친절하게도 국빈용 항공기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었다.
어렵게 서독에 도착한 박 대통령 일행을 거리에 시민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
코리안 간호사 만세!코리안 광부 만세!코리안 엔젤 만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박 대통령은 창 밖을 보며 감격에 겨워 땡큐! 땡큐! 만을 반복해서 외쳤다.
서독에 도착한 박대통령 일행은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광부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탄광에 갔다. 고국의 대통령이 온다는 사실에 그들은 500 여명이 들어 갈 수 있는강당에 모여들었다.
박 대통령과 뤼브케 대통령이 수행원들과 함께 강당에 들어갔을 때 작업복 입은 광부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기에 앞서 우리나라 애국가가 흘러 나왔을 때 이들은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를 수조차 없었다.
대통령이 연설을 했다.
단지 나라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이 역만리 타국에 와서 땅속 1000 미터도 더 되는 곳에서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려 가며 힘든 일을 하고 있는 제 나라 광부들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열심히 합시다"
눈물에 잠긴 목소리로 박 대통령은 계속 일하자는 이 말을 반복했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역만리 타국 땅 수 천 미터 지하에 내려가
힘들게 고생하는 남자 광부들과 굳어버린 이방인의 시체를 닦으며 힘든 병원일 하고 있는 어린 여자 간호사들. 그리고, 고국에서 배곯고 있는 가난한 내 나라 국민들이 생각나서 더 이상 참지 못해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란 귀한 신분도 잊은 채... 소리내어 눈물 흘리자 함께 자리하고 있던 광부와 간호사 모두 울면서 영부인 육 영수 여사 앞으로 몰려나갔다. 어머니! 어머니! 하며.. 육 여사의 옷을 잡고 울었고, 그분의 옷이 찢어 질 정도로 잡고 늘어졌다.
육 여사도 함께 울면서내 자식같이 한 명 한 명 껴안아 주며 "조금만 참으세요"라고 위로하고 있었다.
광부들은 뤼브케 대통령 앞에큰절을 하며 울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 주세요.우리 대통령님을 도와 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를 수없이 반복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여러 광부들이
떠나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우릴 두고 어디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부모님이 보고싶어요"
하며 떠나는 박대통령과 육 여사를 놓아 줄 줄을 몰랐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 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대통령은 손수건을 직접 주며 "우리가 도와 주겠습니다.서독 국민들이 도와 주겠습니다"
라고 힘주어 말했다. 서독 국회에서 연설하는 자리에서 박대통령은 "돈 좀 빌려주세요.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를 반복해서 말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수요일, 3월 09, 2011
해병대 오랜 숙원이던 항공대 창설, 희망이 보인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 해병대가 지휘한다 (뉴델리 뉴스, 2011.03.08)
[국방개혁과제]해병대 숙원이던 기동헬기 40대도 도입키로
김포, 육군에 맡기고 해병대는 신속대응군으로 육성
‘서북도서방위사령부’가 오는 6월 창설된다. 사령부는 해병대의 지휘를 받게 되며 필요시 육·해·공군의 지원을 받게 된다.국방부는 8일 국방개혁과제 중 서북 NLL지역 대비태세 강화를 위해 해병6여단(백령부대),
연평부대를 포함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오는 6월 창설하고, 해병대 사령부를 모체로 합동전투참모단도 대폭 강화하기로 했다.
또한 서북도서 지역에는 북한군의 도발에 대응타격을 할 수 있도록 올해 3월부터 2012년 2월까지 K-9 자주포 등 2
4종의 탐지·타격·지휘통제 전력을 배치하는 한편 2015년까지 도서지역을 요새화하기로 했다.
현재 김포를 방어하고 있는 해병 2사단의 임무를 육군 보병사단에게 이양하고, 해병대는 장비와 편제 등을 바꿔
‘신속대응군’으로 육성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해병대에 UH-60급 기동헬기 40대를 배치하고, 편성도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병대 관계자들은 “이번 국방개혁과제 중 기동헬기 전력 보강은 그간 해병대의 ‘숙원(宿願)’이던 항공대 창설의 시작으로
볼 수 있어 감회가 남다르다”며 향후 해병대 강화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화요일, 3월 08, 2011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꼴이 되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꼴이 되다
대한민국은 세계5위의 군사강국이며 한국 해병대는 세계 2위의 막강한 특수 정예부대이다.
김일성이 해병대를 포항으로 이동 했을 때 북괴군 8개 사단을 동쪽으로 이동 배치 했다는 것은
북괴에겐 그만큼 위축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한 작금의 북괴 동정을 보라 김포에 해병사단이 주둔하자
가시적으로는 서해부대를 빙자한 공기부양 부대를 전진 배치 하고 있지 않는가?
그만큼 두려운 존재가 한국해병대 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군을 한번 돌아보라
호랑이 밑 그림이 고양이로 변해 튀어 나오는 것은
육. 해. 공 삼군 이기주의에다 자기위상 밥그릇 문제 때문이다
전쟁과 국익 국방 안위에 육. 해. 공 삼군 해병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자기 위상을 내세운 견제적 이기심의 결과론 이러다 용두사미가 되지나 않을까 의구심 마저 든다.
해병대는 국가전략기동 타격부대이며 나는 자랑스런 해병대 예비역 이다
자랑스런 전통을 이어받아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명예를 지켜야 할 무적해병 인 것이다.
지금 국회에서 해병대를 독립시킨 4군 체제 전환으로 가기 위해 국군조직법 개정안이 발의 되여 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4군 체제 도입이다. 참고로 미 해군 해병대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여 미 해병대문장(USMC Sentence)에 는
Department of the Navy United States Marine Corps 되여 있다
이 말은 “ 해군 조직의 미국 해병대”란 뜻 이 된다.
국회에 4군 체제 상정법안은 해병대의 독립과는 문제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3군 체제의 해병대를 독립시키는 법안이 옳은 것이라 봅니다.
230년 역사의 미국도 지금 것 그래왔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4군 체제는 없는 것이다.
본인도 해병대 이다. 옳은 것은 박수를 치고 아닌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해군은....... 해병대를 해군으로 부터 독립 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품 안 에 자식을 결혼시켜 같이 계속 사는 꼴이니....... 이러한 것을 비유하는 그것이 해병대의 독립 인 것이다. 이선호 박사님 말씀 처럼 73년 이전 법안의 해병대로 된다 라면 족 하는 것이다.
작금의 국방전술 계획에 의하면 해병대원 약2.000명쯤 증원하여 특수정예부대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전투부대로 나서야 되는 제4세대 전투개념론 이라 한다.
그러나 정작 해병대장병들은 반기는데 해병대장교분들은 시큰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사 책임자며 실무자(이상우단장 전 한림대 학장)가 말 하기를 육군 한 사람 별 하나 딱 붙여 서라도 해병대로 보내서 특수정예부대를 만들겠다는 말이 왜? 나오 는 가?
왜? 무엇 때문에 어째서 미디어 매체에다 기사화 하여 말 했을까요?
말 하자면 대령 급 이상 스타 양반들 반응이 이상 하는 것이다.
휘하 부대 장병들은 박수치고 장교들은 무얼 했나...
나는 해병대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꼬집는다.
1967.11.6일 내 나이 19살 진해 훈련소
태극기아래 맹세한 후 국가관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해병대 아닌가?
오는 유를 가는 무로 할 것인가?
조국이 내게 해준 것도 없는데
나는 국가안위와 국익에 도움이 된다 면
내 피 한 방울 살 한 점까지
내여 놓을 수 있는 이것이
조국수호 자유인의 삶의 일부이며 국민의 몫이다.
부대 밖 현실을 참고 바란다,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는
해병대의 건승을 빌며
지적(知的) 강군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박수를 보낸다.
KMC 195th,
李韓泰
대한민국은 세계5위의 군사강국이며 한국 해병대는 세계 2위의 막강한 특수 정예부대이다.
김일성이 해병대를 포항으로 이동 했을 때 북괴군 8개 사단을 동쪽으로 이동 배치 했다는 것은
북괴에겐 그만큼 위축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한 작금의 북괴 동정을 보라 김포에 해병사단이 주둔하자
가시적으로는 서해부대를 빙자한 공기부양 부대를 전진 배치 하고 있지 않는가?
그만큼 두려운 존재가 한국해병대 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군을 한번 돌아보라
호랑이 밑 그림이 고양이로 변해 튀어 나오는 것은
육. 해. 공 삼군 이기주의에다 자기위상 밥그릇 문제 때문이다
전쟁과 국익 국방 안위에 육. 해. 공 삼군 해병대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자기 위상을 내세운 견제적 이기심의 결과론 이러다 용두사미가 되지나 않을까 의구심 마저 든다.
해병대는 국가전략기동 타격부대이며 나는 자랑스런 해병대 예비역 이다
자랑스런 전통을 이어받아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명예를 지켜야 할 무적해병 인 것이다.
지금 국회에서 해병대를 독립시킨 4군 체제 전환으로 가기 위해 국군조직법 개정안이 발의 되여 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4군 체제 도입이다. 참고로 미 해군 해병대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여 미 해병대문장(USMC Sentence)에 는
Department of the Navy United States Marine Corps 되여 있다
이 말은 “ 해군 조직의 미국 해병대”란 뜻 이 된다.
국회에 4군 체제 상정법안은 해병대의 독립과는 문제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3군 체제의 해병대를 독립시키는 법안이 옳은 것이라 봅니다.
230년 역사의 미국도 지금 것 그래왔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4군 체제는 없는 것이다.
본인도 해병대 이다. 옳은 것은 박수를 치고 아닌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해군은....... 해병대를 해군으로 부터 독립 시켜야 한다는 것인데......
품 안 에 자식을 결혼시켜 같이 계속 사는 꼴이니....... 이러한 것을 비유하는 그것이 해병대의 독립 인 것이다. 이선호 박사님 말씀 처럼 73년 이전 법안의 해병대로 된다 라면 족 하는 것이다.
작금의 국방전술 계획에 의하면 해병대원 약2.000명쯤 증원하여 특수정예부대로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전투부대로 나서야 되는 제4세대 전투개념론 이라 한다.
그러나 정작 해병대장병들은 반기는데 해병대장교분들은 시큰둥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사 책임자며 실무자(이상우단장 전 한림대 학장)가 말 하기를 육군 한 사람 별 하나 딱 붙여 서라도 해병대로 보내서 특수정예부대를 만들겠다는 말이 왜? 나오 는 가?
왜? 무엇 때문에 어째서 미디어 매체에다 기사화 하여 말 했을까요?
말 하자면 대령 급 이상 스타 양반들 반응이 이상 하는 것이다.
휘하 부대 장병들은 박수치고 장교들은 무얼 했나...
나는 해병대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꼬집는다.
1967.11.6일 내 나이 19살 진해 훈련소
태극기아래 맹세한 후 국가관을 잊어 본 적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해병대 아닌가?
오는 유를 가는 무로 할 것인가?
조국이 내게 해준 것도 없는데
나는 국가안위와 국익에 도움이 된다 면
내 피 한 방울 살 한 점까지
내여 놓을 수 있는 이것이
조국수호 자유인의 삶의 일부이며 국민의 몫이다.
부대 밖 현실을 참고 바란다,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는
해병대의 건승을 빌며
지적(知的) 강군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박수를 보낸다.
KMC 195th,
李韓泰
軍, 장성 정원. 계급 11월부터 하향 조정
- ▲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국방개혁과제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관진 국방장관은 8일 오는 2030년을 최종 목표로 합동성 강화와 적극적 억제능력 확보, 효율성 극대화 등을 골자로 한 ’국방개혁 307계획’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눠 추진된다.
김 장관은 “상부지휘구조를 합동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편할 것”이라며 “현 합참에는 효율적인 합동작전 수행 능력이 가능하도록 합동군사령부의 기능을 추가하고 합동군사령관 기능을 겸하는 합참의장에게 작전 지휘를 뒷받침하는 군정 기능을 부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김 장관은 “조직개편이 완성되는 2020년에는 총 15% 수준의 장군직위 감축이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군은 6월까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11월부터 장성 정원 감축 및 직무 대비 상향 편제된 장군직위 계급을 하향키로 했다. 현재 장성 430여명에서 15% 감축되면 60여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김 장관은 “상부지휘구조 개편만으로도 장성 30여명을 포함한 약 1천여명의 간부를 감축해 비대해진 조직을 슬림화하고 연간 인건비를 1천억원 가량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주요 의사 결정시 각 군의 균등한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육.해.공군의 비율을 2대1대1로 유지해 3군 균형발전을 도모할 것”이라며 “국군교육사령부와 같이 창설되는 합동부대의 초대 지휘관은 해.공군으로 보직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상부지휘구조 개편에 따라 각 군 참모총장은 각 군 작전사령부를 통합한 지상.해상.공중작전본부장과 작전지원본부장을 지휘하게 된다.
지상.해상.공중작전본부는 현재의 육군 3군사령부, 해군작전사령부, 공군작전사령부에 위치하게 되고, 작전지원본부는 교육훈련과 편성, 군수지원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또 김 장관은 북한의 국지도발과 비대칭 위협에 우선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전력증강 우선순위를 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계화 전력을 포함한 전면전 대비 전력을 조정해 절감된 재원으로 북한 잠수함 위협에 대비한 신규전력을 추가 확보하고 대포병탐지레이더와 합동직격탄(JDAM) 등 장사정포 대응 능력을 확충할 계획이다.
군 관계자는 “북한 장사정포 파괴 소요 일수를 1주일에서 1~2일로 단축할 것”이라며 “북한군 EMP(전자기펄스)탄으로부터 주요 지휘통제시설을 방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은 “고(高)고도 무인정찰기(글로벌호크)를 도입해 적에 대한 감시 및 정찰 능력을 제고하고 스텔스 기능을 가진 F-X(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적기에 추진하는 한편 공격 및 기동헬기 전력을 대폭 향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무인정찰기인 글로벌호크 도입을 위해 방위사업청은 작년 미측에 LOA(판매의향서)를 신청했으며 오는 6월까지 답신이 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최근 인터넷 분산서비스거부(디도스:DDoS) 공격 등 사이버위협과 관련, 김 장관은 “사이버사령부의 조직과 기능을 강화하고 사이버 전문인력 개발센터 운용 등 사이버전 방어능력을 향상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와관련해 군은 지식경제부와 협의해 ’마이스트로’(사이버전사)를 양성할 계획이다.
6월에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창설하고 장기 과제로 김포반도의 경계임무를 해병 2사단에서 육군으로 교체할 계획이다.
김 장관은 “육.해.공군대학과 합동참모대학을 통합해 합동군사대학을 내년 1월부로 창설하고 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합도 장기 과제로 추진키로 했다”고 말했다.
김포 반도의 경계근무를 육군과 교체
국방부 군 개혁과제(307계획)이 대통령께 보고 되었다고 합니다
모군관련 소식중 굵직한것이 몇몇 들어있기에 링크 올립니다
아래는 기사 원문 주소입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103081426557449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5&aid=0000450560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국방부가 8일 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 청사진인 73개 국방개혁 과제를 확정 발표했다.
국방부는 이날 "대통령에게 보고한 7일에서 따온 계획인 '307계획 개혁과제는 현정부 국방개혁의 최고 최상의 개념으로 합동성강화, 적극적 억제능력 확보, 효율성 극대화 등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다.
307계획 개혁과제는 지난 참여정부시절 중장기적으로 추진할 '국방개혁 2020'을 수정해오다가 천안함 피격사건을 계기로 전면적 보완작업을 거쳐 최종발표된 것이다. 개혁안은 단기(2011~12년)과제 37개, 중기(2013~2015년)과제 20개, 장기(2016~2030년)과제 16개다. 기존 개혁과제 87개에서 해군기동전단 창설, 공군 전투사령부 창설, 각군 인쇄창.복지단 통합 등 완료과제 12제는 제외됐다.
개혁안의 세부내용에는 상부지휘구조 및 국방교육체계 개선,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 장성숫자 감축,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에 명시된 합참과 합동부대에 근무하는 육.해.공군 요원 구성비 준수 등 내용이 담겼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가 오는 6월에 창설된다. 서북 5개 도서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적도발시 도발원점에 대해 즉각 응징태세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함참의장이 작전지휘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관은 해병대사령관을 겸하게 되고 백령부대와 연평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해병대사령관은 유사시에는 해군전력, 공군전력, 육군전력을 지휘할 예정이다.
해병대사령부를 모체로한 합동전투참모단도 대폭 강화되고 해병대는 병력은 물론 기동헬기, K-9등 총 24종 전력을 보강하기로 했다. 장기과제로는 해병대 사단을 재조정하기 위해 김포반도의 경계임무를 육군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서북도서 요새화를 통해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장병과 지역주민의 생존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 합동작전 수행으로 전투력의 시너지효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군관련 소식중 굵직한것이 몇몇 들어있기에 링크 올립니다
아래는 기사 원문 주소입니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103081426557449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0&oid=005&aid=0000450560
[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국방부가 8일 이명박 정부의 국방개혁 청사진인 73개 국방개혁 과제를 확정 발표했다.
국방부는 이날 "대통령에게 보고한 7일에서 따온 계획인 '307계획 개혁과제는 현정부 국방개혁의 최고 최상의 개념으로 합동성강화, 적극적 억제능력 확보, 효율성 극대화 등 내용을 담았다"고 말했다.
307계획 개혁과제는 지난 참여정부시절 중장기적으로 추진할 '국방개혁 2020'을 수정해오다가 천안함 피격사건을 계기로 전면적 보완작업을 거쳐 최종발표된 것이다. 개혁안은 단기(2011~12년)과제 37개, 중기(2013~2015년)과제 20개, 장기(2016~2030년)과제 16개다. 기존 개혁과제 87개에서 해군기동전단 창설, 공군 전투사령부 창설, 각군 인쇄창.복지단 통합 등 완료과제 12제는 제외됐다.
개혁안의 세부내용에는 상부지휘구조 및 국방교육체계 개선,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창설, 장성숫자 감축,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에 명시된 합참과 합동부대에 근무하는 육.해.공군 요원 구성비 준수 등 내용이 담겼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가 오는 6월에 창설된다. 서북 5개 도서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적도발시 도발원점에 대해 즉각 응징태세를 구축하기 위해서다.
함참의장이 작전지휘하는 서북도서방위사령관은 해병대사령관을 겸하게 되고 백령부대와 연평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해병대사령관은 유사시에는 해군전력, 공군전력, 육군전력을 지휘할 예정이다.
해병대사령부를 모체로한 합동전투참모단도 대폭 강화되고 해병대는 병력은 물론 기동헬기, K-9등 총 24종 전력을 보강하기로 했다. 장기과제로는 해병대 사단을 재조정하기 위해 김포반도의 경계임무를 육군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군 관계자는 "서북도서 요새화를 통해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장병과 지역주민의 생존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 합동작전 수행으로 전투력의 시너지효과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요일, 3월 06, 2011
대학교 해병대 전우회 다양한 활동 벌여
제목 대학 해병대 전우회 다양한 활동 벌여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rokmc2006
대학 해병대 전우회 다양한 활동 벌여
학교, 지역 봉사활동 펼치고 리더십 강연도
(한국대학신문. 2011년 2월 22일)
상승회, 필승회, 하룡회 등 이름부터 강인함이 느껴지는 각 대학 해병대 전우회 모임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다. 학교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나서서 돕고 지역 봉사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연평도 포격 사건과 배우 현빈 씨의 해병대 지원 등 해병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인기가 높아지는 가운데, 대학 해병대 전우회 모임을 찾아 해병대 이야기와 전우회에서 벌이는 다양한 활동에 대해 들었다.
하룡회는 1986년 창설된 인하대 해병대 전우회 모임이다. 이들은 꾸준히 인하대 내 호수인 인경호 청소 봉사를 해오고 있다. 호수 청소를 하며 군가를 부르거나 기마전을 선보이기도 해 학생들이 인경호 주변을 둘러싸고 이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또한 하룡회는 조를 짜서 매주 월요일 학교 아동양육시설인 향진원에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룡회 회장인 나동현 (산업공학 1) 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데 해병대를 나온 우리보다 아이들이 체력이 좋아 지칠 정도”라며 “축제 때는 아이들을 학교에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한국외대 해병대 전우회인 ‘아쿠아마린’ 역시 단순한 친목 도모 이외의 활동을 하고 싶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을 찾기 시작했다.
아쿠아마린 부회장인 류한솔 (러시아 3) 씨는 “학교 근처 식당들의 도움을 받아서 나눔에 집에 갈 때 할머니들 간식도 사가고 할머니들의 말벗이 되어드린다”고 말했다.
연세대 해병대 전우회 모임인 상승회는 다른 해병대 전우회와 차별화된 기획을 진행했다. 상승회는 2009년부터 ‘해병대 정신과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마련했다.
상승회 회장인 김기호 (기계공학 3) 씨는 “해병대 전우회에서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을지 고민하다가 해병대 출신이면서 본보기가 될만한 선배를 모시고 리더십 특강을 진행했다”며 “올해에도 해병대 출신 선배를 모셔놓고 리더십에 대한 강연을 준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씨는 덧붙여 “해병대 전우회는 고락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학과 선후배보다 공유하는 것도 통하는 것도 많다”며 “선배들이 진로 상담도 많이 해주고 친구들에게 하기 어려운 고민도 선배에게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멘토-멘티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 한국대학신문
http://www.unn.net/news/detail.asp?nsCode=69197
홈페이지 http://cafe.naver.com/rokmc2006
대학 해병대 전우회 다양한 활동 벌여
학교, 지역 봉사활동 펼치고 리더십 강연도
(한국대학신문. 2011년 2월 22일)
상승회, 필승회, 하룡회 등 이름부터 강인함이 느껴지는 각 대학 해병대 전우회 모임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친목 모임이 아니다. 학교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나서서 돕고 지역 봉사활동을 벌이기도 한다.
연평도 포격 사건과 배우 현빈 씨의 해병대 지원 등 해병대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인기가 높아지는 가운데, 대학 해병대 전우회 모임을 찾아 해병대 이야기와 전우회에서 벌이는 다양한 활동에 대해 들었다.
하룡회는 1986년 창설된 인하대 해병대 전우회 모임이다. 이들은 꾸준히 인하대 내 호수인 인경호 청소 봉사를 해오고 있다. 호수 청소를 하며 군가를 부르거나 기마전을 선보이기도 해 학생들이 인경호 주변을 둘러싸고 이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또한 하룡회는 조를 짜서 매주 월요일 학교 아동양육시설인 향진원에서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룡회 회장인 나동현 (산업공학 1) 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데 해병대를 나온 우리보다 아이들이 체력이 좋아 지칠 정도”라며 “축제 때는 아이들을 학교에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한국외대 해병대 전우회인 ‘아쿠아마린’ 역시 단순한 친목 도모 이외의 활동을 하고 싶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인 ‘나눔의 집’을 찾기 시작했다.
아쿠아마린 부회장인 류한솔 (러시아 3) 씨는 “학교 근처 식당들의 도움을 받아서 나눔에 집에 갈 때 할머니들 간식도 사가고 할머니들의 말벗이 되어드린다”고 말했다.
연세대 해병대 전우회 모임인 상승회는 다른 해병대 전우회와 차별화된 기획을 진행했다. 상승회는 2009년부터 ‘해병대 정신과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마련했다.
상승회 회장인 김기호 (기계공학 3) 씨는 “해병대 전우회에서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을지 고민하다가 해병대 출신이면서 본보기가 될만한 선배를 모시고 리더십 특강을 진행했다”며 “올해에도 해병대 출신 선배를 모셔놓고 리더십에 대한 강연을 준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씨는 덧붙여 “해병대 전우회는 고락을 같이 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학과 선후배보다 공유하는 것도 통하는 것도 많다”며 “선배들이 진로 상담도 많이 해주고 친구들에게 하기 어려운 고민도 선배에게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멘토-멘티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출처 : 한국대학신문
http://www.unn.net/news/detail.asp?nsCode=69197
금요일, 3월 04, 2011
1973년 국군의날 행사장에서의 불행한 사고
73년 10월 1일 여의도에서 거행된 건군25주년 국군의 날 행사는 해병대 사령부의 해체를 목전에 두고 있던 해병대장병들에게 있어서는 착찹한 심정을 금치 못하게 한 행사였다.
그 때 이미 약 400명의 전역 희망장교 중 약 300명은 9월 10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전역을 하고 그 나머지는 9월 30일과 10월 10일(이병문 사령관과 전속부관 각 국감실장 및 의장대장.헌병대 보안과장 등 10여명) 부로 전역을 하게 돼 있었으므로 부대 내부의 분위기는 몹시 썰렁했고, 당시의 사령부 보안대장 임경섭준장이 박 대통령에게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던 것처럼 장병들의 감정이 그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10월 10일 이병문 대장의 전역식을 마치고 그 날 부로 전역을 했던 사령부의 마지막 의장대장은 이상우 대위(해간 36기)였고 서울지구 해군헌병대 보안과장은 김무일대위(해간35기)였다.
그런데 해병대로서는 마지막 국군의 날 행사에 참가했던 그 날 여의도 5.16광장 행사장에서는 액운이 끼어 있었던지 육군공수부대 정예요원들의 예기치 못한 랜딩 실수가 발단이 된 해병대 대원들과 공수부대 대원들 간의 감정적인 충돌로 인해 공수부대 요원 한 사람이 척살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그 날을 마의 날로 기억되게 했다.
그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메인행사인 분열식이 끝난 후 휘나레를 장식하는 육군공수특전단 요원들의 고공낙하 시범이 진행되고 있던 중 로이얄 박스의 랜딩 포인트에 낙하해야 할 수 명의 공수단 요원들이 그 지점을 벗어나 그 부근에 있는 해병대 행사부대 장별들의 일부 내무실 천막에 떨어진 것이 발단이 되어 해병대의 천막 감시병들과 공수단 대원들(하사관) 간에 시비가 벌어졌고, 결국은 그 사소한 시비가 화근이 되어 수모를 당한 공수단 요원들이 그들의 내무실로
가서 수십 명의 동료 대원들을 데리고 와서 소수의 해병대 감시병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자 행사를 마치고 부서진 천막으로 돌아와 감시병들이 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 행사부대 대원들이 격분을 하여 때마침 행사를 마치고 그 천막 앞을 통과하고 있는 육군공수단의 지프차와 트럭을 세워 영문을 알지 못하는 공수단요원들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러한 경황에 지프차에 타고 있던 공수단요원 한 사람이 일전을 불사할 태세로 차에서 내려 대검을 뽑아 들자 표범 같이 덤벼 든 해병대 대원 한 명이 그 대검을 탈취하기가 무섭게 (그 대검으로)그 공수단 요원을 척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그러한 사고가 발생하자 육군헌병대와 해군서울지구 헌병대(장,윤웅섭 중령)에서는 즉각 합동수사반을 편성하여 포항으로 내려갈 병력수송열차와 김포 여단으로 들어갈 병력수송차량을 밤늦게까지 세워 놓고 진상을 파악하는 한편 가해자의 검거에 나섰으나 결국 가해자를 색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미제사건이 되고 말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되어 있듯 훗날(87년)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 서류에 결재를 한 공수단 출신의 전두환대통령이 박구일 중장에게 특별히 지시한 그 3가지 사항 중 "싸움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은 특히 육군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그와 같은 트러블이 재발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간곡한 충고의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
그 때 이미 약 400명의 전역 희망장교 중 약 300명은 9월 10일과 20일 두 차례에 걸쳐 전역을 하고 그 나머지는 9월 30일과 10월 10일(이병문 사령관과 전속부관 각 국감실장 및 의장대장.헌병대 보안과장 등 10여명) 부로 전역을 하게 돼 있었으므로 부대 내부의 분위기는 몹시 썰렁했고, 당시의 사령부 보안대장 임경섭준장이 박 대통령에게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던 것처럼 장병들의 감정이 그만큼 악화되어 있었다.
10월 10일 이병문 대장의 전역식을 마치고 그 날 부로 전역을 했던 사령부의 마지막 의장대장은 이상우 대위(해간 36기)였고 서울지구 해군헌병대 보안과장은 김무일대위(해간35기)였다.
그런데 해병대로서는 마지막 국군의 날 행사에 참가했던 그 날 여의도 5.16광장 행사장에서는 액운이 끼어 있었던지 육군공수부대 정예요원들의 예기치 못한 랜딩 실수가 발단이 된 해병대 대원들과 공수부대 대원들 간의 감정적인 충돌로 인해 공수부대 요원 한 사람이 척살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그 날을 마의 날로 기억되게 했다.
그 사건의 개요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메인행사인 분열식이 끝난 후 휘나레를 장식하는 육군공수특전단 요원들의 고공낙하 시범이 진행되고 있던 중 로이얄 박스의 랜딩 포인트에 낙하해야 할 수 명의 공수단 요원들이 그 지점을 벗어나 그 부근에 있는 해병대 행사부대 장별들의 일부 내무실 천막에 떨어진 것이 발단이 되어 해병대의 천막 감시병들과 공수단 대원들(하사관) 간에 시비가 벌어졌고, 결국은 그 사소한 시비가 화근이 되어 수모를 당한 공수단 요원들이 그들의 내무실로
가서 수십 명의 동료 대원들을 데리고 와서 소수의 해병대 감시병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가하자 행사를 마치고 부서진 천막으로 돌아와 감시병들이 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 행사부대 대원들이 격분을 하여 때마침 행사를 마치고 그 천막 앞을 통과하고 있는 육군공수단의 지프차와 트럭을 세워 영문을 알지 못하는 공수단요원들에게 시비를 걸었고, 그러한 경황에 지프차에 타고 있던 공수단요원 한 사람이 일전을 불사할 태세로 차에서 내려 대검을 뽑아 들자 표범 같이 덤벼 든 해병대 대원 한 명이 그 대검을 탈취하기가 무섭게 (그 대검으로)그 공수단 요원을 척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그러한 사고가 발생하자 육군헌병대와 해군서울지구 헌병대(장,윤웅섭 중령)에서는 즉각 합동수사반을 편성하여 포항으로 내려갈 병력수송열차와 김포 여단으로 들어갈 병력수송차량을 밤늦게까지 세워 놓고 진상을 파악하는 한편 가해자의 검거에 나섰으나 결국 가해자를 색출해 내지 못함으로써 미제사건이 되고 말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앞에서 언급되어 있듯 훗날(87년)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 서류에 결재를 한 공수단 출신의 전두환대통령이 박구일 중장에게 특별히 지시한 그 3가지 사항 중 "싸움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했던 그 말은 특히 육군과의 사이에 벌어졌던 그와 같은 트러블이 재발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간곡한 충고의 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
1983년 광주 상무대에서 만났던 해병대소위들에게
운영자
2010.05.16 21:40:04
1983년 광주 상무대에서 만났던 해병대소위들에게 - 해병대CD中에서
어이 해병대 친구들! 나를 기억하겠나?
나는 18년 전인 1983년 당시 상무대 전투병과학교에서 자네들 ROTC출신 해병대 신임소위들을 위탁교육을 하던 육군교관 이준재다! 정말 반갑다! 정말 오랫만에 자네들에게 연락을 하게 되는구만. 자네들과 헤어진지 벌써 18년이 흘렀네. 이제 자네들과 나도 이젠 서로 같이 늙어가는건가?
하하..! 한 번 보고들 싶다.
자네들!
옛날 신임소위 초군반시절 육군소위들과 내게 훈련을 받을 때 기억들이 나나?너희 해병대출신 소위들이 우리 교관들을 좀(?) 많이 괴롭혔던 것도..? 후후...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니 정말 재미있고 우습다.당시 구대장까지 팼던 고모 소위를 비롯해서... 육군훈련이 시시하다며 객기를 부리며 야간 훈련에 불참하던 일, 그리고 내무반에서 술마시다가 육군소위들과 트러블이 발생하여 결국은 상무대 전체를 마당으로 집단 패싸움으로 번졌고 불과 30여명 밖에 안되던 너희들에게 수백명이 밀려서 도망가던 기억들... 그래서 너희들 해병대동기 전원을 퇴교조치의 엄명이 내려졌던 일...사태가 번지자 당시 상무대로 파견되었던 해군헌병대의 해병소령이 직접 나서서 칼같은 불호령 한마디가 순간에 사건을 잠재웠지만...
정말 그 때는 사건 사고가 많았었지? 하여간 말이지. 너희 해병대는 몇명이 안되는데도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치고 특이했어.그 때가 1983년 3월이었지? 너희 해병대 소위들 가운데 한명이 우리 구대장 한명을 식당에서 두들겨 패는 어처구니 없는 하극상사건 때문에 괜한 우리 교관들까지 완전군장하여 연병장을 밤새도록 뛰었던 일...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 동기생들 가운데 육군소위들만이 대신하여 밤새도록 뺑뺑이 돌고 얼차려를 당했던 일들.그 때 그 사건의 주범(?)이었던 고소위는 다음날 목포에 있는 해역사 해군헌병대로 넘겨졌다는데...그러나 정상적으로 제대를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지금 모 은행에서 부지점장으로 근무한다는 소식도 언젠가 만났던 당신들 동기생으로부터 들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때 그 일들이 잊혀지지가 않아. 내가 직접 지휘하던 구대에 있던 2명의 소위들도 정말 나를 피곤하게 했었지..인상이 험악하고 술을 잘 마셨던 현소위는 워낙 성격이 터프한 운동선수(유도)라서 상대하기가 싫었고...또 한명의 곱상하던 김소위는 내 기억으로는 술은 전혀 안마셨고 몸집이 작은 데도 화려한 태권도 발차기 솜씨가 환상적이어서 출중하여 우리 교관들까지 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던 기억들...하지만 그 당시 너흰 터프하고 애물단지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정말 사나이 다웠던 것 같아. 정말 우리 교관들 애는 많이 먹였었지만 그래도 정말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더군. 그래서 솔직히 너희들 해병대가 부러운 적도 있었어.자네들이 16주 위탁교육을 마치고 해병대로 돌아가는 날...그 곳 상무대를 떠나면서. 나를 찾아와 악수하면서 마지막으로 눈물을 지었었지..?
그래서 나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어...그 때 자네들이 보였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만나거든 그 이유를 한번 얘기 해줄 수들 있겠나.
16주 동안 사건 사고를 워낙 많이 저지르며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해병대소위들이 나에게 마지막 날 눈물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나 이준재,
이 곳 홈페이지에 방문하여 당시 우리 구대원들에게 흔적을 남긴다. 나는 얼마 전까지 현역에 남아서 155마일 최전방에서 조국을 지키다가 이젠 사회인으로 돌아왔다. 반갑다,
그리운 친구같은 후배들이여...!
이준재
어이 해병대 친구들! 나를 기억하겠나?
나는 18년 전인 1983년 당시 상무대 전투병과학교에서 자네들 ROTC출신 해병대 신임소위들을 위탁교육을 하던 육군교관 이준재다! 정말 반갑다! 정말 오랫만에 자네들에게 연락을 하게 되는구만. 자네들과 헤어진지 벌써 18년이 흘렀네. 이제 자네들과 나도 이젠 서로 같이 늙어가는건가?
하하..! 한 번 보고들 싶다.
자네들!
옛날 신임소위 초군반시절 육군소위들과 내게 훈련을 받을 때 기억들이 나나?너희 해병대출신 소위들이 우리 교관들을 좀(?) 많이 괴롭혔던 것도..? 후후...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니 정말 재미있고 우습다.당시 구대장까지 팼던 고모 소위를 비롯해서... 육군훈련이 시시하다며 객기를 부리며 야간 훈련에 불참하던 일, 그리고 내무반에서 술마시다가 육군소위들과 트러블이 발생하여 결국은 상무대 전체를 마당으로 집단 패싸움으로 번졌고 불과 30여명 밖에 안되던 너희들에게 수백명이 밀려서 도망가던 기억들... 그래서 너희들 해병대동기 전원을 퇴교조치의 엄명이 내려졌던 일...사태가 번지자 당시 상무대로 파견되었던 해군헌병대의 해병소령이 직접 나서서 칼같은 불호령 한마디가 순간에 사건을 잠재웠지만...
정말 그 때는 사건 사고가 많았었지? 하여간 말이지. 너희 해병대는 몇명이 안되는데도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치고 특이했어.그 때가 1983년 3월이었지? 너희 해병대 소위들 가운데 한명이 우리 구대장 한명을 식당에서 두들겨 패는 어처구니 없는 하극상사건 때문에 괜한 우리 교관들까지 완전군장하여 연병장을 밤새도록 뛰었던 일...
그리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당신 동기생들 가운데 육군소위들만이 대신하여 밤새도록 뺑뺑이 돌고 얼차려를 당했던 일들.그 때 그 사건의 주범(?)이었던 고소위는 다음날 목포에 있는 해역사 해군헌병대로 넘겨졌다는데...그러나 정상적으로 제대를 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지금 모 은행에서 부지점장으로 근무한다는 소식도 언젠가 만났던 당신들 동기생으로부터 들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때 그 일들이 잊혀지지가 않아. 내가 직접 지휘하던 구대에 있던 2명의 소위들도 정말 나를 피곤하게 했었지..인상이 험악하고 술을 잘 마셨던 현소위는 워낙 성격이 터프한 운동선수(유도)라서 상대하기가 싫었고...또 한명의 곱상하던 김소위는 내 기억으로는 술은 전혀 안마셨고 몸집이 작은 데도 화려한 태권도 발차기 솜씨가 환상적이어서 출중하여 우리 교관들까지 기를 완전히 꺾어버렸던 기억들...하지만 그 당시 너흰 터프하고 애물단지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래도 하나같이 정말 사나이 다웠던 것 같아. 정말 우리 교관들 애는 많이 먹였었지만 그래도 정말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더군. 그래서 솔직히 너희들 해병대가 부러운 적도 있었어.자네들이 16주 위탁교육을 마치고 해병대로 돌아가는 날...그 곳 상무대를 떠나면서. 나를 찾아와 악수하면서 마지막으로 눈물을 지었었지..?
그래서 나도 따라서 눈물을 흘렸어...그 때 자네들이 보였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 만나거든 그 이유를 한번 얘기 해줄 수들 있겠나.
16주 동안 사건 사고를 워낙 많이 저지르며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해병대소위들이 나에게 마지막 날 눈물을 보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나 이준재,
이 곳 홈페이지에 방문하여 당시 우리 구대원들에게 흔적을 남긴다. 나는 얼마 전까지 현역에 남아서 155마일 최전방에서 조국을 지키다가 이젠 사회인으로 돌아왔다. 반갑다,
그리운 친구같은 후배들이여...!
이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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