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3월 27, 2011

피아노 가요 모음

    피아노 가요 모음 01. 9월의 노래 02. 가을을 남기고 간사람 03. 고향의 푸른 잔디 04. 그 날 05. 그대 그리고 나 06. 그대 변치 않는다면 07. 그저 바라볼 수만 있다면 08. 기다리는 마음 09. 꽃반지 끼고 10. 꽃반지 끼고  11. 나무와 새 12. 나와 같다면 13.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14.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15. 남포동 브루스  16.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17. 너를 사랑하고도 18. 눈이 내리네 19. 눈이 내리네 20. 당신만을 사랑해 21. 당신만을 사랑해 22. 당신은 모르실거야 23. 당신은 모르실거야 24. 돌아오지 않는 강 25. 떠나버린 가을 26. 립스틱 짙게 바르고 27. 미련(전영록) 28. 미워도 다시 한 번 29. 바람에 실려 30. 비와 외로움 31. 빗물 32. 빛과 그림자 33. 사랑-김하정 34. 사랑은 계절 따라 35. 사랑은 영원히  36. 사랑은 Andante 37. 사랑의 세레나데 38. 사랑이 저만치 가네 39. 사랑이여 다시 한 번 40. 사랑하는 당신이 41. 숙명 42. 슬픈 눈동자의 소녀 43. 실비 오는 소리 44. 아름다운 것들 45.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 46. 여고 시절 47. 여고시절 (방) 48. 연인의 길 49. 열애 50. 옛 시인의 노래   51. 옛시인의 노래 52. 우정 53. 울지 않아요 54. 이 마음 다시 여기에 55. 이별 56. 이별 57. 장난감 병정 58. 저 높은 곳을 향하여 59. 제비 60. 진고개 신사 61. 첫사랑의 언덕 62. 타인의 계절 63. 타인의 계절 64. 파도 65. 파도  66. 하숙생 67. 하얀 손수건 68. 하얀 손수건 69. 하와이 연정 70. 한 사람을 위한 마음 71. 호반의 벤치


토요일, 3월 26, 2011

한국 국민들을 감동시킨 일본인 며느리




韓國 國民들을 감동시킨日本人 며느리!


 
효 실천 일본인 며느리의 '휴먼' 드라마   
 
대가족 이끌며 농사 생계 챙겨 친정아버지 병들자 모셔와 
돌아가 실때까지 병수발도.. 한 여인이 있다.
 
산도 낯설고 물도 낯선 이국 땅에 시집와 나이 든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3년 전부터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남편
을 대신해 갖은 농사를 지어가며 세딸을 모범생으로 키워내
고 있는 일본 태생의 이 여인. 국경을 넘은 지극한 효심과 헌
신적인 가족애로 주위를 감동시키고 있다.
 
멋진 한국 남성과 깊은 사랑에 빠졌을 뿐이었다.
 
먼저 한국으로 시집간 친구의 친구가 소개해 만난 한국 농촌 
의 노총각이었다.
1년이 넘도록 몇십통의 편지가 대한해협을 넘나들었고, 꿈에 
그리던 얼굴을 
마주하려 한국과 일본을 오가기도 했다. 
 
그렇게 미야자키 히사미(43)씨와 이진기(46)씨는 1997년 
결혼에 골인했다. 일본 자동차회사에서 사무를 보던 일본 여성에게 강원도 양양 
에서 의 농사일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낯선 땅에서 
시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과 믿음직한 남편의 사랑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는 세월이었다.
 
은별(9), 은솔(8), 은비(6) 딸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미야자키씨 
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건 2004년. 하루 일을 
마치 고 돌아온 남편이 갑자기 앓아누웠다.
 
힘겨운 농사일에 몸살인 줄로만 알았다. 복통과 고열, 구토에
시달 린 남편은 결국 서울아산병원까지 실려갔다. 진단 결과는 뇌수
막염 이었다. 열은 40도까지 치솟았고, 한달 넘게 의식을 잃은남편
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절망했으나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다소 서툰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남편을 너무 좋아해서 결혼한 건데요. 아프니까 더 사랑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차분한 말투였지만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늙으신 시부모님과 어린 
세 딸, 시력·청력을 잃은 남편을 돌봐야 하는 고행길이 펼쳐졌다.
 
남편이 일구던 느타리버섯 농장은 그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남편의 1급 장애인 생활보조금 등 한달에 100만원 정도를 군청에서
받았지만, 대가족을 이끌어야 할 여성 가장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5년 8월 일본에 있는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쓰러
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동딸인 자신마저 한국으로 옮겨와 홀몸인 상태였다.
 
아버지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려니, 못 보고 못 듣는 남편은 물론 
시부모님과 자식들이마음을 붙들어맸다.
결론은 “아버지를 모셔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한국 땅 양양의 딸 곁에서 다섯달의 여생을 평안히 
마칠 수 있었다. 
 
미야자키 히사미 ( 농협효행상 대상 수상자)            
2007. 5.3일 오전 서울 농협중앙회 본사에서 만난 미야자키씨는   
수줍게웃었다. 
 
지역농협의 추천으로 그는 제12회 농협효행상 수상자가 됐다. 
그는 여전히 남편 생각뿐이었다 
지난해 300만원에서 3천만원 으로 늘어난 상금은, 
남편이 편히 움직이며 생활할수 있는 시설을 
집에 갖추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남편의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을 써서 대화해요.
효행상 받는다고 했더니, 남편이 ‘축하한다’고 했어요. ” 
얼굴에 10년 전 새색시의 부끄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금요일, 3월 25, 2011

이근식 예비역 해병 대령님의 블로그에서 퍼온글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게 되었는가? 海兵精神. by oldmarine 2008/02/29 10:22 marinekslee.egloos.com/8510607 덧글수 : 0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게 되었는가?
우리, 50년대의 해병들은 왜 육군을 무시하며 싫어했는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살아져 버렸을 지난 일들 일 수 있으나 오늘의 해병들에게 선배해병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세대가 지나기 전에 그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당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육군을 무시하고 싫어하는 것이 우리의 자부심으로,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행세하고 있었으나 부득기한 사실을 비하의 구실로 삼았던 오래 전의 우리들 자신이 지금은 부끄럽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 해병들이 육군을 비하하고 싫어하게 된 무엇보다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한국전쟁 중으로 거슬러 올라 가야한다. 여기에는 특히 우리의 형제 해병대인 미 해병대도 우리에게 미 육군을 Doggy Army라고 비하하여 부른 것도 한목했었다. 그 당시 한국 해병대는 초창기였는지라 미 해병대의 작전통제하에 상당 기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오늘날의 미 해병들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그 당시의 미 해병들은 우리를 진정 Brother Marine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를 여러모로 도와주었었다. 우리도 그들을 Big brother라고 부르고 환대했었다.
1951년 4월 해병 제1연대가 중동부전선에서 그 간의 여러가지로 어려웠던 한국 육군의 작전통제로부터 지휘체계가 변경되면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통제하에 있게 된 후 미 해병 제1사단의 좌일선 연대로 38도선 이북으로 북진 중에 있을 때 우리의 좌측방에서 중공군과 전투 중에 있던 한국 육군 제6사단(사단장 S 소장)이 중공군의 춘계대공세에 밀려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지 10여 분만에 어이없게 전선이 돌파당하여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공군의 급속한 돌파구 확장에 따르는 포위에 대비하여 미 해병 제1사단의 명령에 의거 우리, 해병 제1연대는 2박2일 간(당시 필자는 제1대대 첨병소대장이었음) 38도선 이북으로부터 38도선 이남으로 우리가 평생 잊을래 잊을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강행군을 계속하였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해병대 전투"(3): "해병 제1연대의 후퇴이동"에서 상세히 설명되어 있음.
그때의 해병들의 가슴 속에 사무쳤던 육군에 대한 원한 같은 것으로 인하여 육군을 싫어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육군을 멸시하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전투지대내에서 발견되는 육군은 장교건 사병이건 모조리 포로로 취급하였다. 그것은 그런 육군을 우리는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그 감정이 당시의 그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들에 의해 구전되면서 더욱 과장되거나 심화되어 육군에 대한 감정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더욱 악화되었으며 더욱이 그런 육군에는 무엇을 하건 이겨야한다는 선배들의 선동?도 여기에 크게 작용했음은 빼어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당시 우리 해병대는 대육군에 비하면 1개 연대 병력밖에 안되니 숫적인 열세를 이런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해병 제1연대 제1대대 제2중대 3소대장이었으며 후퇴이동 중 대대 첨병소대장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의 해병들의 고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도 그때의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 순간을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으나 다시는 생각조차 하고 싶지않은 심정이다. 그때의 해병들은 지금 80대 전후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하여 그로 인하여 우리, 해병들이 그들보다 월등하게 강하고 또한 우수하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우물안의 개구리같은, 우물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하늘 전체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같은 어리석은 생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육군은 어디까지나 대육군이기 때문이다. 수가 많으면 그 속에는 약자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도 모르고 무턱대고 육군을 깔보거나 싫어하는 해병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오늘날도 종종 보고 또한 그들에 대해서 듣게 되는데 이런 편협된 사고방식은 이미 오래 전에 버렸어야 했다. 지금은 이래서는 안된다. 그럴려면 거기에 합당한 상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도 모르고 육군을 무조건 싫어하거나 깔본다는 것은 너무나 유아독존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하여 그들이 우리를, 해병대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알고 있어야 하며 이는 오래 전의 일이니 이제는 그것이 부득기한 사실이었음을 이해하고 받아드려서 그들과 화목하게 지내야한다.
50년대에 야기된 육군과의 주요 충돌사건 중 대표적인 것을 몇가지 간단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이 실례를 들 수 있다.
1. 열차 속에서의 난동
한국전쟁이 휴전(1953.7.27)된 후(1956년)에 해병대 창설의 주역이었던 많은 고참 하사관(해병 1, 2기 및 해군 13,14기)들이 전역하고 귀향길에 올라 있을 때의 일이다. 이때 나는 진해에 있는 해병학교의 사관후보생 중대장 이었다. 어느날 교수부장(문희석 중령)을 수행하여 서울행 야간열차인 "통일호"를 탔다. 이때 군 전용열차는 "통일호"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육군 수송관의 해병대 소령이라는 특별 배려로 중령급 이상 장교에게 허용되는 침대칸을 배정 받았다.
침대칸에서 한참 자고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해병대 소령님 어디에 계십니까?" 하며 나를 환급히 찾는 다급한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왜 그러시요?"하고 대답했다. 일어나 보니 육군 수송관이었다. "큰 일 났습니다. 지금 열차 안에서 해병대 대원들과 육군 사병들 간에 큰 싸움이 벌어젔는데 해병대가 육군을 때려 눕히고 싸움을 말리던 헌병까지 두들겨 패서 열차안이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열차가 못가고 정차해 있으니 소령님 나와서 싸움을 좀 말려주세요"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속으로 그럼 그렇지 이들이 조용히 돌아갈 리가 있나? 하고 중얼거리면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해병대 장교 정모를 쓰고, 물론 장교 약복을 입고 수송관을 따라서 사병칸에 가 보니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 광경은 미국 서부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 같았다. 담배 연기까지 자욱했고 술병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나는 사병칸에 들어 서자마자 "왜들 자지않고 이렇게 시끄러워!"하고 이들의 기를 꺽기 위하여 우선 소리부터 질렀다. 그때 나는 26세의 나이였으며 태권도 유단자였다. 순간 조용해젔다. 그런데 뒷쪽에서 "뭐야!"하는 내 목소리보다 더 큰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대로 선채로 그들을 노려봤다.
그런데 그들 중에 누군가 "이 소령님 아니십니까?" 하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내가 알고 있는 하사관이었다. 이것이 신호나 된 듯 여기 저거서 "이 소령님 웬 일이십니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인사를 듣고도 나는 아무 소리 안하고 그대로 서있었다. 사실은 나는 그들이 너무 반갑고 고마워서 감격하여 그대로 서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일 누군가 "너는 뭐야!" 했으면 해병대 소령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강성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아마 살인까지 마다했을 지도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한국전쟁 중 소대장, 중대장할 때의 그 전투정신이 생생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해병대의 명예는 일순 간에 땅에 떨어져 버리고 똥이 되었을 것은 분명한 순간 이었다. 그리고 사태는 더욱 악화됐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대 장교님이다" 하면서 이들은, 해병대 하사관들은 전부 아무 소리 안하고 자기들 자리로 돌아 갔다. 우리가 언제 싸움질 했나? 하는 그런 표정들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그들은 역전의 용사답게 지난 날에 자기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전투를 한 그들의 상관을 비록 제대하고 귀향 중에 있었지만 존경하고 있었다. 오늘의 해병들도 이럴 수 있을까? 이것이 참다운 가식이 없는 순수한 해병정신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병정신은 어떤 구호나 장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히 상관을, 또는 남을 위하는 양보이기도 하다. 이것이 참말로 내가 오늘의 해병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었다.
2. 육군 공수단 사병들과의 싸움
50년대의 해병들과 육군 공수단 사병들 간의 관계는 마치 견원지간의 사이 같았다. 때문에 부득기 충돌도 종종 피할 수 없이 있었다. 통상 그 시비는 영등포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 출발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 소속된 군의 우월성의 자랑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이 도에 넘치게 되면 싸움으로 번졌다.
그날은 육군 공수단 소속 사병이 해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자기들의 김포공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육군 공수단 본대에 보고한 후 보복하기 위하여 집단으로 김포공항 앞 버스정류장에서 해병들이 탄 버스가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영등포에서 강화행 버스가 도착하여 정류장에 정차했는데 그 버스 속에서 김포 해병부대로 돌아가기 위하여 타고있는 해병들을 공수단 사병들이 끌어 내려서 집단으로 두들겨 패버렸다.
영문도 모르고 두들겨 맞은 해병들은 김포의 본대에 돌아 가서 이 억울한 사실을 보고하고 소속 지휘관도 모르게 해병대 추럭에 해병들을 싣고 와서 김포공항 앞의 주점거리 일대에서 육군 사병들을 보이는 족족 두들겨 패기시작하여 큰 싸움으로 번져서 그 일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해병들은 육군 헌병과 육군 공수단 병력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추럭을 타고 김포의 해병부대로 돌아간 큰 사건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이걸 보고 해병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썩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고 좋아했지만 실은 그렇지만 않았다. 해병대는 그때만 해도 너무 단순해서 이런 결과가 육군 수뇌부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생각했는 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3. 국일관에서의 패 싸움
50년대에 해병대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 장안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종로의 "국일관"(지금은 헐려서 없음)에서 해병대 장교와 육군 장교 간의 싸움은 아주 유명했다. 캬바레인 "국일관"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육군 장교의 시비로 치고 박고하는 싸움이 해병대 장교들과 시작되었는 데 처음에 이 장면을 관망하고 있다가 나중에 이 싸움에 합세한 해병대 민용식 소령의 날쎈 발차기 동작을 수반한 싸움 솜씨는 그가 혼자서도 육군 장교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도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해병대 장교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춤추러 왔던 민간인들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놀랐었는데 이것이 크게 소문이 퍼져서 서울 장안 일대에 상당기간 화젯거리가 되었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듣고 육군을 때려 눕힌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고 여간 좋아 하지않았다. 그 이유는 해병대 전투(3)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우리는 그때에 왜 그렇게 육군을 미워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중동부전선에서 해병 제1연대의 좌측 정면을 맡고있던 육군 제6사단이 중공군에게 돌파당하여 그 어려웠던, 평생 잊을 수없는 후퇴이동, 38도선 이북으로부터 2박2일 간에 걸친 강행군으로 38도선 이남으로 철수 중에 우리가 겪은 고생때문에 아니었는가 나는 생각된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빼어 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동부전선에서 육군의 작전통제하에 북한군을 소탕하는 작전 간 육군으로부터의 보급물자의 지원이 얼마나 나빴는지 우리 모두는 마치 거지 같은 몰골로 강원도의 산악지대의 엄동설한 속에서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 당시의 우리의 몰골이 어떠하였다는 것을 지금 생각만해도 우리는 완전히 거지 꼴이었다. 따라서 육군에 대한 해병들의 원망도 크지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런 사실은 그 당시에는 잘 모르고 지났지만 작전통제권이 미 해병대로 이관된 후부터 미 해병대로부터의 풍부한 군수물자의 보급은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육군 속에서 전투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면에서도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그러니 이것 역시 우리가 육군을 원망하고 싫어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해병들 간에 구전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사로운 이해 부족에서 오는 감정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지만 육군의 입장에서는 그대로 웃어 넘기거나 또는 잊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은 못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때 우리는 이런 사건, 사실들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의 자랑으로 삼고 있었으나 당한 육군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웃어넘길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이런 눈에 보이지 않은 감정의 대립이 후일(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해체의 사유의 한 몫을 점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런 풍조는, 무엇을 하건 해병대는 그런 육군에게 꼭 이겨야한다는, 심지어 싸움을 하드라도 꼭 이겨야하고 술을 마셔도 이겨야한다는 것 같은 강박관념은 당시의 우리의 선배로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억지같은 논리는 지금 생각하면 우리 해병대는 너무나 철이 없었고 또한 순진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생각되기도 한다.

수요일, 3월 23, 2011

가혹 행위에 '곪아터진' 해병대 전통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로 드러난 해병대 모 연대 선임병들의 그릇된 후임병 관리 문화는 구타·가혹행위에 관용적인 해병대 특유의 문화와 지휘감독자의 관리 부실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24일 인권위가 공개한 해병대 모 연대 내 가혹행위를 보면, 청소 불량·암기 소홀·군기 유지 등의 이유로 철봉 매달리기·엎드려뻗쳐 등의 얼차려부터 상습 구타, 이른바 ‘악기 바리’로 불리는 음식물 강제 취식 등이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수시로 폭행 및 가혹행위를 당한 한 사병은 행정관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으나, 구두 훈계만 이뤄져 이후 더욱 심한 폭행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결국 이 피해 사병이 기절해 의무실에 실려가고 나서야 가해 사병에 대해 영창 등의 징계가 내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다른 사병은 선임 병사의 기수와 조리식단 메뉴를 외우지 못하고, 빵 5개를 제한 시간 내에 먹지 못했다는 이유로 심하게 구타를 당해 응급실 치료까지 받았다. 하지만 행정관은 고소하지 말라며 이 사병을 설득하고 가해자에게는 영창처분만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대부분 가해자는 인권위 조사에서 “후임병 시절 유사한 구타·가혹행위를 당했고 이를 참고 견디는 것을 ‘해병대 전통’으로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등 가혹행위의 문제점과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고 인권위는 전했다.
 
인권위는 이어 폭행사건을 상급자에게 발설할 경우 기수 열외 등 2차 피해를 주는 폐쇄적 조직 문화, 지휘·감독자들이 부대의 명예훼손과 불이익을 우려해 ‘구타에 대해 엄정히 사법처리하라’는 관련 원칙을 준수하지 않고 경미하게 처리하려는 경향을 해병대의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2010년 의무대 환자 발생보고서를 보더라도 고막 천공(구멍이 뚫리는 것) 30여건, 비골ㆍ늑골 골절, 대퇴부파열 등 타박상 기록이 250여건에 이르지만 발병 경위 등은 부실하게 기록돼 있었다고 인권위는 밝혔다.

인권위 관계자는 “연평도 포격 사태 때 해병대가 용기있는 행동으로 국민에게 많은 신뢰를 줘 젊은이들도 앞다퉈 해병대에 지원하는 상황에서, 이런 발표를 하게 돼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부대원 상호 간 존중과 소통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해병대 전통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해병대의 미래가 시작되는 이곳에서....

[레벨:10]운영자
2011.03.18 10:28:37
요 근래 매스컴에 해병대가 많이 타면서 특히 브라운관에 자주 비춰졌던 이 장면... 기억하세요?
바로 해병대 교육훈련단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모습이랍니다. 오늘은 교육훈련단에서 시작되는 해병대 신병훈련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해병이 되기 위해서는 장교, 부사관, 병 구분 없이 거쳐야 하는 곳이 바로 이 해병대 교육훈련단이죠! 특히 신병 양성교육 과정은 가입소 1주 후 본격적으로 6주동안 체계적인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즉각적으로 전투임무수행이 가능한 전투원 육성'을 목표로 진행됩니다.
가입소 1주 동안은 실질적인 훈련에 앞서 준비하는 단계로 신체검사와 피복을 지급 받습니다! 그리고 귀가심의를 통해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강인한 정신력과 신체가 준비된 자만이 이발을 한 후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을 신병교육대로 입소하게 되는거죠~
처음 1주차는 '군 기본자세 완성'에 중점을 두고 교육에 임합니다. 군인복무규율, 안보교육 등 정신교육에 중점을 두고 교육을 하여 육체적 훈련을 받기 전 군인, 그리고 해병으로서의 강한 정신 무장을 하는거죠~

2주차는 '단결심 배양'에 목표를 두고 해병대 관련 과목 위주로 진행된답니다. 해병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KAAV에 대해 배우고 직접 탑승도 하고, 공수기초훈련과 해병대 훈련하면 딱 떠오르는 '고무보트 머리에 이고 뛰어다니는' IBS 훈련도 2주차 훈련 중의 일환이고요. 

그리고 해병대하면 역시...상륙이죠!?
상륙을 하려면 수영은 필수! 신병들은 전투수영을 배웁니다. 수영을 못하는 훈련병들도 훈련기간이 끝나면 문제 없이 전투적으로 적진을 향해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갈 수 있게 되죠! ^^;
3주차에는 '사격능력 배양'을 목표로 이제 드디어 많은 신병들이 생에 처음으로 총을 쏠 기회를 맞이합니다. 신병들은 K-2를 이용한 사격을 하게 되며 영점사격부터 해서 연습사격, 기록사격, 그리고 야간사격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특히 안전이 최우선시 되기 때문에 모두 정신 바짝 차려야한답니다.

사격훈련이 끝나면 4주차에는 그 기본을 바탕으로 '전투기술 습득'을 위해 유격훈련과 야지적응력을 높이게 됩니다. 특히 레펠훈련은 유격훈련의 백미로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되죠. 물론 레펠 전의 PT체조는 지옥이지만요 ^^;

또한, K-3, K-201 등 공요화기 사격 훈련과 함께 수류탄 투척훈련도 실시하여 수류탄의 위력을 직접 체험하게 된답니다! 대단하죠? 물기둥이 솟아오르면서 땅이 흔들흔들 한답니다.

드디어 교육훈련의 하이라이트, 5주차 '극기주'까지 왔습니다. 극기주에는 '극기심 함양'을 목표로 전투체력을 완성하는 훈련이 이뤄집니다.
어떠한 극한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력과 전투력을 배양하기 위해 목봉훈련, 각개전투, 화생방, 시가지 전투, 천자봉 행군을 실시하게 되죠. 평소보다 훈련의 강도는 훨씬 강해지고, 수면시간은 짧아지고, 배식량도 줄어듭니다. 훈련병들은 이러한 상황을 맞이하며 악조건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천자봉 행군을 마친 뒤에는 뜻 깊은 마침표가 찍혀지죠. 드디어 오른쪽 상의에 '빨간명찰'이 달립게 됩니다.
빨간명찰을 가슴에 달고 마지막 6주차에는 '기초전술 완성'에 중점을 두고 교육이 진행되며 종합평가 및 교육사열을 통해 신병들의 전투기술능력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끝났다!!! 하고 수료식을 실시함으로써 드디어 자랑스러운 해병대원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곧 실무로 배치되어 '훈단이 끝이 아니었구나..' 혹은 '훈단에서 동기들과 훈련 받을 때가 좋았지...' 라고 생각하는 날이 금.방. 찾아오게 된답니다 ^^ <해병대블로그  날아라마린보이>



진해행정학교에서 교육수료하는 해병대 이등병들

[레벨:6]슈퍼맨
2010.07.09 19:11:03
사진은 진해행정학교에서 교육후 수료하는 해병대 이등병들의 면회모습으로 보입니다.
사진출처 : 다음 이윤근의 사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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