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1931 - 1966)
1931년 7월 2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386번지에서 출생한 해병 소령 이인호는 1953년 3월 23일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뜻을 품고 1954년 4월 10일 해군사관학교 제11기로 졸업, 해병소위(군번 83496)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1959년 미 상륙전학교를 수료하였으며 1960년 미 해병대 상륙전부대훈련과정(LFTU)을 이수하고 1964년 육군공수특전교육 및 수중폭파훈련(UDT)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해병대 제1상륙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65년 해병대 제2여단 작전보좌관으로 근무 후 부인 이경자 여사와 1남 1녀의 자녀를 뒤로하고 자유의 십자군으로 월남에 1966년 파병 해병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장교로 참전하였다.
1966년 8월 11일 14:20시에 월남전선 「투이호아」지구 해풍작전에서 체포한 여자 베트공으로부터 입수한 첩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1개조(4명)를 지휘 동굴수색 중 적이 수류탄을 투척해오자 대원들에게 “수류탄이다 엎드려라”지시하면서 투척해온 수류탄을 베트공이 있는 쪽으로 집어던지고 또 다시 날아온 적의 수류탄이 부하 대원들이 집결된 지점에 투하되어 폭발하려는 순간 다수대원들의 생명이 위험함을 알고 구출하기 위한 일념으로 수류탄을 껴안고 현장에서 장렬히 산화하였는바 이는 오직 그의 숭고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투철한 군인정신의 발로로서 자유 우방 전 장병의 표상이 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소령으로 1계급 특진과 군인으로서 최고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또한 미국정부에서도 은성무공훈장을, 월남공화국에서는 엽송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이인호 소령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해병대에서는 장교들의 성금과 사회각계각층의 성금으로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와 해병교육기지인 진해에 동상을 건립하여 그의 유덕을 추모하고 그의 군인정신을 끝까지 길이 남게 하였다.
고 이인호 해병소령의 동상을 1967년 3월 22일 교육사령부 영내인 경남진해시 경화동 1105번지에 해군교육사령부에서 경내면적 66평, 기단높이 0.5m, 동상높이 7.1m로 건립하였으며 건립취지는 1966년 8월 11일 월남「투이호아」지구에서 해풍작전 수행 중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고 폭사한 군군영웅 이인호 소령의 살신성인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건립동상의 비문에는 「그대 만리이역 월남 동굴에서 가슴에 수류탄을 안고 산화하던 날, 하늘도 무심치 않아 비를 내렸다.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청춘도, 정든 임도 즐거이 바치고 아아! 스스로 장렬한 폭사를 하였다. 대륜은 충효라 스스로 속이지 않고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 가르쳤거늘, 그대 아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했구나. 그대 뿌린 씨가 천배 만배 될지니, 나라도 사랑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라. 흐르는 눈물이 오히려 그대에게 부끄럽구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가족들의 통곡하는 사연을 차마 못 들을레라. 천정을 향하여 나는 눈만 껌벅이고 있다. 그대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흩어져 이슬이 되었거니, 타는 불이어 이 가슴마저 태워다고. 그대를 지아비라 아빠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전우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이용사여 조국의 영웅이여 고이 잠들라. 그대를 제자라 형제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동포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아 용사여 대한의 샛별이여 길이 복되라. - 한솔 이효상(국회의원) - 조. 이인호 소령」라고 쓰여 있으며 해군사관학교에서는 매해 이인호 소령동상 앞에서 인호제가 거행되고 있다.
고 이인호 소령의 애국 충정과 살신성인의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거행되는 인호제는 해군사관학교장을 비롯하여 각급 해군, 해병 지휘관, 유가족 및 4학년 생도가 참석하여 고인의 공적을 기리는 추도문과 결의문을 낭독하며, 헌화와 분향을 하여 고인을 추모한다. 고인의 살신성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67년에 이인호 소령 동상을 건립하였고, 1977년부터 매년 인호제를 거행해 오면서 해군사관생도들이 고 이인호 소령의 희생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짐해 오고 있다.
2. 공적
「해풍작전」은 1966년 7월 22일부터 8월 17일까지 실시한 작전으로 여단이 「캄란」에 상륙한 이래 이른바 공산군의 백년아성으로 악명 높았던 「투이호아」지역 및 「히에우 수옹」평야일대에 은거하며 약탈행위를 자행하여 온 적의 주력을 격파(청룡 제1, 2 및 재건 제1, 2호 작전을 전개)하여 평정지역을 확대 확보한데 이어 그 잔적들을 수색 - 격멸함으로써 전 여단병력을 「투이호아」에서 추라이(Chu Lai)로 이동하기 위해 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아군의 공격으로 와해되었던 적은 월맹군 제325사단 95연대 및 18연대 예하의 2개대대와 베트공, MF 제30대대 예하의 4개 중대규모의 지방 베트공인데, 특히 이들 적은 이 지역에서의 식량의 보급원을 상실하였을 뿐만아니라, 소위 월맹군 - 베트공 간의 연합전선이 와해됨으로써 각종 군수물자의 보급과 병력보강능력을 상실케 되어 아군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가운데 소규모 게릴라 전법으로 그 돌파구를 모색코자 광분하고 있었다. 이번의 주 작전지역은 적의 약탈이 극심한 취약지역인 동시에 「히에우 수옹」평야는 면적이 140㎢로써 월남의 3대곡창(연간 110,000 톤의 양곡생산)중의 하나인데, 이 일대는 무수한 대소하천이 흐르고 있어 관개시설이 양호하며 습지를 제외하고는 논밭의 경작하기 가장 좋은 지역으로 주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따라서 여단은 「재건2호 작전」종료롸 동시에 7월 22일 08. 00시를 기하여 제1, 3대대를 각각 헬기공수로 작전지역에 투입하였다. 제1대대는「카우 송 반」산 북동쪽과 「지욱 킨」산 북쪽 및 「미케」(1)지역에 제3대대는 북서쪽「다란강」남안에 투입하여 동쪽으로 북상하면서 적을 소탕하는 일련의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소규모 전투는 있었으나 큰 피해없이 베트공 은거지역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그 은거지역에 숨은 적을 소탕하면서 7월 31일까지 작전을 종결하고 7월 22일부터 제3대대는「두더지3호 전투」를 전개하여 제9, 11중대 피해없이 적을 소탕하고 소화기은닉처를 발견하여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아랜드(W.C. Westmoreland) 대장의 격려 메시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탁반」(Thach Ban)전투를 7월 25일부터 제3대대가 전개하였다 「탁반」전투는 7월 24일「탁반」(5)일대에 베트공 1개소대 규모가 준동하고 있다는「탄미」(Tan My)지역에서 체포된 베트공 용의자의 진술을 분석한 끝에 제1중대로 하여금 7월 25일 07. 00시를 기하여 수색정찰을 전개토록 하여 적 사살 5명, 포로 1명을 압송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7월 29일부터 8월 8일에 돌풍 제1호전투를 제3대대 10, 11중대가 수색정찰을 실시하여 천연동굴을 파괴하고 수류탄과 대인지뢰 4발을 노획하였다. 다시 8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돌풍 제2호 전투」를「히에우 수옹」평야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미레」부락 근처에 자동화기와 소총으로 무장한 지방 베트공 25명이 주간에는 농부로 가장하고 있다가 야간에는 폭도로 돌변하여 이 부락 일대를 활보하면서 기습과 약탈 행위를 일삼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본 수색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작전지역 상황은 「히에우 수옹」평야 중앙을 「반라이」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으며 「미레」(1)(2)(3)(4)부락 동남쪽에는 표고 216m의 「차이」산이 우뚝 솟아있어 아군의 활동을 감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부락 및 논밭사이에는 무성한 숲으로 이루어져 관측과 사계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반라이」강의 소하천과 주변의 습지 및 웅덩이 그리고 개활지 등은 아군의 기동에 장애요소가 된 반면에 방어하는 적에게는 유리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락은 수차례에 걸친 아군의 수색전과 포격 등으로 파괴된 농가와 폐가옥으로 남아있어 얼핏 황폐화된 전장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였으나, 이 같은 정경은 오히려 잔적들의 암약에 유리할 듯 판단되었다. 당시의 적정은 작전지역내에서 체포된 베트공 용의자들의 제보에 의하면 지방 베트공 잔당(25명으로 추산)이 「미레」부락 주변의 숲속에 거점을 확보하고 천연동굴속에 무기와 탄약 등을 은익하고 있다가 수시로 무장을 갖추어 기습을 감행한 강도의 행각을 서습치 않고 있다는 공통된 첩보이다. 그리고 이들 잔존 베트공에 대한 증원세력은 주변에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간 중 기상개황은 평균 39℃의 무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비교적 청명한 날씨에다 북동풍이 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대대장 이효갑 중령은 9일 19:50시부터 각 중대별 소대단위로 공격목표「미레」주변을 포위하기 위한 야간 매복에 이어 10일 06:00시를 기하여는 제9중대를 주력으로 삼면협공에 의한 수색과 소탕전을 전개토록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9일을 D일로 하여 제9중대는 18:35시에 중대기지를 출발하여 제1소대가 「미레」(1) 서북쪽 500m 지역에, 또한 제2소대가 「미레」(4) -「푸락」(2)지역에, 그리고 제3소대가 「푸락」-「수안 틴」(1)지역에 각각 진출하여 매복호를 구축함과 동시에 주변 일대를 수색끝에 야간매복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제10중대는 19:05시에 중대기지를 출발하여 제2소대장 변봉준 중위의 지휘아래 제2소대로서 제9중대 지휘소를 확보함과 동시에, 제3소대가 제9중대 2소대의 우측방인 「푸락」남쪽에서 야간 매복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날 각 매복조가 배정된 위치에서 철저한 사주경계 아래 적의 침투를 포착코자 주력하였으나 아무런 적정을 발견하지 못한 가운데 철수하였다.
8월 10일 06:00시를 기하여 제9중대 제1소대장 권기옥 중위는 전날의 매복지역으로부터 동북진하면서 「미레」서쪽-「수안 틴」서쪽을 수색하고, 제2소대장 이윤호 중위는 「미레」-「푸락」에 이르는 매복지역으로부터 서북진하면서 「푸락」(1)-「푸락」(2)지역을 각각 협공으로 수색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제10중대 2소대(-), 1분대 이기원 중사는 제9중대를 엄호하기 위하여 중대 지휘소를 출발하여 「미레」(1) 동북쪽-「수안 틴」(1) 서쪽 고원지대에 연하는 소로를 차단하는 한편, 제3소대장 조영진 중위는 「미레」(4) 북쪽-「수안 틴」(2)에 이르는 3등 도로변에서 차단임무를 각각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삼면포위망을 형성하고 축차적인 수색으로 압박하던 중 07:30시에 최초로 제9중대 3소대의 수색로이었던 「푸락」(1)부락 입구에서 아군의 수색대를 발견하자 주변 농가쪽으로 황급히 도피하는 베트공 첩자 1명을 제2분대 한재구 병장이 위협사격 끝에 체포하였는데, 이 자는 의약품을 다량으로 휴대하였는가 하면 상세한 이 부락 일대의 지도를 소지하고 있었다.
또한 제1소대는 「미레」(1)-「미레」(4) 구간을 탐색 중 08:40시에 이 부락을 연결하는 소로상에서 군용 수통을 휴대한 거동이 수상한 남자 3명과 여자 1명을 검색한 결과 괴문서와 의약품 등이 색출되자 대대 지휘소로부터 직접 본 작전에 참가하였던 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가 현지에서 신문(월남 통역인 대동)한 바 베트공첩자로 판명되어 이 자들을 앞세워 베트공 은거지로 알려진 「미레」(1) 서쪽 300m지점에서 천연동굴 1개소를 발견하여 내부에 숨어있는 2명의 여자 베트공 용의자를 추가 체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날의 수색결과는 베트공 첩자 7명을 포로로 한 것을 비롯하여 이들이 휴대하고 있던 의약품과 불온문서 등을 압수한 가운데 각 소대는 일몰과 더불어 수색현지에서 야간매복으로 들어갔다.
8월 11일 대대장 이효갑 중령은 베트공첩자들이 「미레」(1)지역 주변에서 7명이나 체포되었고, 특히 2명의 여자첩자들은 모두가 베트공 가족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예의 중요시하고 예하 참모들과 철야 심문한 끝에 베트공 잔당의 은거지와 무장병력규모 및 활동실태 등을 파악하게 되었다. 즉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베트공 핵심분자 5, 6명이 「미레」(1)부락 서북쪽 150m 지점의 대나무 숲속에 은폐된 지하동굴을 거점으로 하여 칼빈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주변일대에서 기습과 폭력을 일삼고 주민들의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효갑 중령은 제9중대 1소대와 3소대로 하여금 08:00시를 기하여 이 동굴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제10중대 2소대와 합세하는 즉시 일제히 삼면협공을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는 이 지역을 숙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날 베트공첩자들의 제보를 직접 검토 분석하였던 담당관이므로 본 동굴 수색전에 참전시켜 줄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고 즉시 헬리콥터편으로 여자 베트공 첩자 2명과 월남인 통역인을 대동하고 제9중대 1소대의 수색지역에 강습착륙하여 동굴탐색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리하여 14:15시에는 목표지역의 지하동굴을 베트공첩자들이 안내한대로 대나무 숲속에서 발견하여 제9중대 1, 3소대로 하여금 동굴 주변을 전면포위토록 하는 한편, 베트공 첩자 2명을 앞세우고 제1소대 3분대장 김찬옥 하사 외 4명과 함께 동굴 입구로 진입하였다. 그런데 이 동굴은 입구의 직경이 70㎝, 길이가 10m로 지하 깊숙이 곡선으로 통로가 구축된 “T”자형의 바위 인공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순간, 이인호 대위는 우선 김찬옥 하사로 하여금 동굴 내부에 3개의 수류탄을 연속투척하여 반응을 확인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으므로 5분후에 김찬옥 하사를 선두로 분대원 고인원 병장과 이종길 병장 그리고 곽찬연 상병과 김수진 상병을 뒤따르도록 하여 동굴속으로 진입케 하였던 바, 동굴내에 흩어져 있는 수류탄 3발, 소총실탄 137발, 권총실탄 6발, 구급낭 2개, CAR 탄띠 1개, 중기관총 탄약통 1개 등을 노획하고 나왔다. (동굴 내부는 겨우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암굴) 이에 이인호 대위는 얼핏 석연치 않은 예감을 느꼈는데 그 까닭은 베트공 첩자들이 제보한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수차례의 작전을 통하여 자신의 정보판단이 추호의 차질이 없었고 또한 본 동굴수색전에 시종 참가함으로써 제반첩보를 종합분석 끝에 진행되고 있는 작전인 만큼 더욱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인호 대위는 직접 1개조 4명을 이끌고 동굴 내부를 재확인하면서 5m 전방까지 진입하였을 때, 동굴이 좌측방으로 좁게 굴곡이 되어 있어 “굴이 또 있구나” 하면서 계속 진입하려던 찰라, 갑자기 수류탄 1발이 날아들었다. 이때 이인호 대위는 뒤따르던 대원들에게 “수류탄이다! 엎드려라!” 하고 외치면서 날아든 수류탄을 재빨리 집어 적이 있는 방향으로 던져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재차 날아든 1발의 수류탄은 미처 집어던질 여유가 없어 이 한맺힌 흉탄을 안은 채 장렬히 폭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뒤따르던 부하 김찬옥 하사 외 3명은 위기일발의 사지에서 구출되었는데 이때가 14:40시이었다. 그러자 분노에 서린 대원들은 사생을 초월하여 소화기 사격과 수류탄을 연속 투척하면서 공격하니 적은 실로 아수라의 참상속에 비명소리만 들렸다. 얼마 후 소연과 사체의 냄새로 가득찬 동굴속을 수색한 결과 현장에는 피에 물든 베트공 사체 5구와 칼빈소총 2정, 실탄 7발, 수류탄 7발, 야전침대 1개, 라디오 1대, 휴대용 전지 2개, 손목시계 2개, 그 밖에 약간의 의약품과 식량 등이 파괴 또는 소각된 채 흩어져 있었다. 이윽고 이 동굴 폭파전을 못내 끝맺지 못하고 산화한 이인호 대위의 유해는 곧 이어서 구조 헬리콥터편으로 대원들의 울분과 애도속에 대대 지휘소로 이송되었으며, 이어서 “마의 동굴”을 TNT로 산산조각을 낸 후 17:00시를 기하여 각 중대가 기지에 복귀함으로써 본 수색전은 매듭을 지었다.
그런데 이역만리 월남전선에서의 탁월한 정보장교의 전사는 상승해병의 슬픔이오, 우리 한국군의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강건한 투혼은 동시에 우리 국군의 귀감으로서 대공전선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불굴의 표상이었다. 대대 정보장교이었던 이인호 대위는 평소 과묵하고 통찰력이 풍부한데다가 예민한 정보판단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작전에 공헌한 바 공적이 지대하였던 해사(제11기) 출신의 우수한 장교이었다. 그의 전사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한결같이 애도와 추모의 뜻을 표하였으며 장례도 해병대장으로 엄수하여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또한 해병대에서는 장교들의 성금과 사회 각계각층의 성금으로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와 해병교육기지인 진해에 동상을 건립하여 고인의 유덕을 추모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소령으로 1계급 추서함과 아울러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또한 미국 정부에서도 은성무공훈장을 전달하고 장렬히 전사한 고 이인호 소령의 명복을 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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