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과 6여단 경계 방어에만 투입 … 상륙부대 1사단은 장비와 인원 부족*
<북한 급변사태 시 신속히 북한을 안정화시키려면 해병대를 동원해 서해에 상륙하는 것이 유리하다.>
★7월 4일 인천 강화도에 주둔한 해병대 2사단(청룡) 예하 부대에서 한 소대원이 동료 네 명을 쏴 숨지게 하자 “소수정예를 자랑하는 해병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군을 안다는 사람들은 “구시대적으로 ‘악으로 깡으로’만 외치며 운영하니 그렇게 된 것”이라며 해병대 특유의 기수 문화를 비판했다. 1967년 베트남 짜빈동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군 연대의 공격을 막아내 외신에 ‘신화를 남긴 해병(Myth Making Marines)’으로 소개됐던 부대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휴전선 방어에 투입한 육군 사단은 20여 개다. 이 중 10여 개가 휴전선을 지키는 전방관측소(GOP) 부대고, 나머지는 이들을 지원하는 예비 부대다. 휴전선 길이가 155마일(250여km)인 점을 감안하면, 육군 한 개 사단이 지키는 전선 길이는 대략 25km다. 국방개혁 2020 등에서는 GOP 사단의 작전구역을 가로 15km, 세로(종심) 30km로 정해놓았으니 육군 사단이 맡는 전선(가로 ) 길이는 20km 내외로 볼 수 있다.
육군 두 개 사단 구실해온 해병대 2사단
해병대 2사단이 맡은 김포·강화 지역은 육군 GOP 사단이 담당하는 지역과 조건이 다르다. 강화도와 그 부속도서인 교동도, 우도 등은 북한과 가까워 전 해안에 경계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 한강 하구도 북한을 마주보고 있으므로 전체를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섬의 해안선과 한강 하구를 더한 길이가 휴전선과 비슷한 250여km다. 물론 해안선이 구불구불해 길게 측정된 탓도 있겠지만, 해병대 2사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해병대 2사단 예하 부대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분대가 들어가 지켜야 하는 섬이 있을 정도다. 이러니 기수를 따지는 병사 중심의 문화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군 구조개혁 방안인 8·18계획을 추진한 노태우 대통령 때도 해병대 2사단의 관할 지역이 너무 넓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됐다. 해병대는 상륙전을 해야 하는 부대이므로 김포와 강화는 육군이 지켜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래서 해병대 2사단을 빼내고 육군을 배치하려고 실사해보니 2.8개 사단, 적어도 두 개 사단을 넣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육군이 두 개 사단을 김포·강화 지역에 투입하면, 나머지 사단이 맡아야 하는 작전 지역이 넓어진다. GOP 사단은 물론이고 예비사단과 군단의 작전구역도 재조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해병대 2사단을 빼내는 것은 없던 일이 됐다. 그 후로는 ‘해병대는 용맹하다고 하고, 그 지역은 섬이 많으니 해병대가 지키는 것이 맞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해병대 2사단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이러한 부담은 고려하지 않은 채 “운영이 구시대적이라서 그렇다”는 비판만 난무했다.
한국군이 안은 고질 중 하나는 해병대를 육군처럼 운영한다는 점이다. 미국 육군은 분대를 9~10명으로 구성하지만 해병대는 12명 이상으로 편성한다. 따라서 같은 소대라도 해병대 병력이 더 많다. 미 육군 사단 병력은 1만2000여 명 정도지만 해병대 사단은 1만5000여 명 이상으로 구성한다. 이는 상륙전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그러나 한국 해병대의 사단 병력은 육군 사단과 엇비슷하다.
<해병대 용맹함 밖으로 증폭시켜야>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은 대한민국 유일의 상륙부대다. 그런데도 이 부대의 병력은 육군화가 많이 이뤄진 해병대 2사단보다 적다. 전략 예비부대라는 이유로 전선을 맡지 않아, 예하 부대를 여러 곳으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해병대 1사단은 유사시 북한 중허리로 상륙해 제2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그런 만큼 항상 완편(完編)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상륙전을 못할 정도로 부대를 줄여놓았다. 해병대의 육군화를 막고 상륙전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한 국방개혁 사안이지만 이명박 정부는 우선순위를 뒤로 미뤄놓았다.
해병대는 용감하다는 이유로 전력 증강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해병대는 상륙전을 하는 기동부대이므로 육군의 기계화부대 이상으로 좋은 장비를 갖춰야 하는데 거꾸로 갔다. 해병대 부대에는 육군에서는 보기 힘든 구식 장비가 즐비하다. 유일한 예외가 해병대 6여단과 연평부대에 제공한 K-9 자주포다. 6여단과 연평부대는 10여km 이상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사거리가 10km 이상 되는 포를 보유해야 한다. 155mm포와 한국형 방사포인 ‘구룡’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 군 수뇌부는 육군이 다수인 탓인지 ‘군단에는 155mm포, 사단과 여단에는 105mm포’ 식으로 정형화한 포 배분론을 신봉한다. 이 때문에 해병대 6여단에는 북한 땅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105mm포를 제공했다. 이 문제점을 꿰뚫어본 이가 조성태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1999년 명품 155mm 자주포인 K-9이 생산되자 당시 장관이던 그가 백령·연평도에 이 포를 먼저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 덕분에 지난해 11월 북한군이 연평도로 포격을 퍼붓자 연평부대는 K-9을 쏘며 반격할 수 있었다. 그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이날 연평부대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조 전 장관 같은 정책결정권자의 배려가 극히 이례적이라는 사실이다.
예상 가능한 북한 급변사태 중 하나는 북한 내전이다. 북한내전이 벌어지면 신속히 군대를 파견해 안정화해야 한다. 내전은 권력 핵심 부서가 있는 평양에서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으므로 평양부터 점령해야 한다. 휴전선에 배치한 육군의 기계화사단이 평양까지 달려가려면 조밀한 북한군 방어망을 뚫고 200여km를 달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과 교전이 없으리라고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해병대를 파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동강 하구로 상륙한 해병대는 50여km만 주파하면 평양에 닿을 수 있다.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이러한 상륙전을 지원하는 전진기지가 돼야 한다. 해군도 강력한 상륙전 세력을 갖춰야 한다. 해군의 전투부대는 함대→전단→전대 순으로 작아진다. 1980년대 해군은 전단 규모의 상륙전 세력을 보유했지만 지금은 전대 수준만 갖고 있다. 미군은 비상시에 대비해 상륙전용 함대를 만들고 이 함대에 해병대 대원과 장비를 항상 태워놓는다. 한국은 아시아 최대의 상륙함이라는 독도함을 갖고 있지만, 해병대와 해병대 장비를 전혀 태워놓지 않는다.
해병대를 정상화하려면 먼저 해병대 1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보완해 완편 상륙사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김포·강화 지역 방어는 육군 사단이 맡고 해병대 2사단은 후방으로 빼내 완편 상륙여단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확보한 여력으로 기동헬기를 운영할 해병대 항공여단을 창설해야 한다. 현대 상륙전에선 기동헬기가 필요하니 해병대는 반드시 항공여단을 가져야 한다.
끈끈한 전우애를 가진 해병대를 넓은 지역에 펼쳐놓는 것은 올바른 활용법이 아니다. 해병대는 한곳에 모아놓았다가 유사시 쓰나미처럼 돌격상륙하는 전략군으로 써야 한다. 해병대의 올바른 활용을 무시한 국방개혁안은 다시 짜여야 한다.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下·끝]
당시 美 언론들 극찬 - "2차대전 후 최고의 승전보"… 닉슨 대통령도 나서 "쾌거"
강군 토대 닦은 베트남戰 - 64년부터 8년간 31만명 파병, 맹호·청룡부대 등 승리 신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지려는 혈전(血戰)이 전쟁 말 곳곳에서 벌어졌다. 텍사스고지, M1고지 전투가 그 대표적인 현장으로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1953년 7월 27일, 3년 2개월에 걸친 포성(砲聲)이 멈췄다. 당시 나는 60연대장이었다.
1948년 제주 4·3사건부터 시작된 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 5년을 넘겼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65년 3월 김용배 육군참모총장이 나를 호출했다. 육군작전참모부장으로 발령 내면서 1964년 터진 베트남전 연구를 지시했다.
좌익·종북주의자들은 지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미제의 용병'이라 폄하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 미2·7사단을 빼려 했다. 당시 미군 1개 사단 전력은 국군 수개 사단에 맞먹을 만큼 강했다.
- ▲ 베트남에 파병된 해병 청룡부대 용사들이 고노이섬에서 작전을 벌이기 위해 헬기에서 내리고 있다. 청룡부대는 월남전에서 ‘귀신잡는 해병’신화를 재확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결국 우리는 1964년 9월 외과병원 장병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병했다. 1965년 1월 8일 2000명의 군사원조단을 보냈고 비둘기부대·육군 맹호부대·해병 청룡부대를 파견하게 됐다. 8년간 연인원 31만2853명이 참전하게 됐다.
1972년 3월 사령부가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은 월남에서 신화적인 무공을 세운다. 그중 내가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은 '두코 전투'와 해병 신화(神話)를 세운 '짜빈동 전투'다. 맹호6호, 오작교, 암행어사작전도 그에 못지않다.
- ▲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라는 노래로 유명한 맹호부대 용사들. 성대한 환송식이 열렸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다.
8월 9일 밤 10시 40분부터 다음날 새벽 4시 30분까지 월맹군 2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아군 1개 중대를 기습했다. 적의 맹렬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교통호 속에서 견디던 맹호용사들은 미군 전차 2대가 지원해주는 틈을 타 반격에 나섰다. 백병전 결과는 대승이었다. 아군은 7명이 전사했지만 월맹군 189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잡았고 기관총·로켓포·실탄 수만 발을 노획했다. 미군사령관은 현장을 찾아 "보지 않고는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압승"이라고 했다.
당시 공격부대는 월맹군 88연대 2개 대대 700명 병력으로 아군보다 6배나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후퇴 때 꼭 시체를 챙겨 가는데 그럼에도 200명가량을 남긴 걸 보면 500명 가까이를 잃은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것이다.
다음 날 현장을 찾은 외신기자 중 1년 후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 된 모세 다얀이 있었다. 그는 당시 통신사 기자였는데 두코전투의 포병전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7년 6일전쟁 때 전격전(電擊戰)의 신화를 이끈다.
큰 전과를 올렸지만 월맹군의 보복이 걱정됐다. 다섯달 후 마침내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 파월한국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청룡부대 11중대가 타깃이 된 것이다. 청룡부대 주둔지 주변의 부락민들은 거의 적색(赤色)분자였다. 월맹군은 한국군의 손발을 묶으려는 듯 아이와 어린아이들을 맨 앞에 내세우며 공격해 왔다. 1967년 2월 14일, 짧았던 구정(舊正) 휴전이 끝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당시 11중대 1소대장이 지금 재향군인회 신원배 사무총장이다.
월맹군은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했다. 적 수백 명이 달려들었지만 2분대장 이중재 하사가 화염방사기 사수(射手)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쳐 무력화시킨 뒤 이진 병장, 김용길 중사가 수류탄으로 적 대전차유탄포·로켓 진지를 무너뜨렸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백병전은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결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적 1개 연대 공격을 우리 해병 1개 중대가 막아내자 미국 언론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고의 승전보라 평가했다.
닉슨 대통령도 나섰다. "17년 전(6·25전쟁 때)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쾌거입니다!" 이 전투 후 뉴욕타임스가 월맹의 지령문을 보도했다.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
월맹군은 한술 더 떠 한국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니 비무장 한국군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말라.' 전투에 참가한 병사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대한민국 훈·포상법 제정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국은 월남에서 유례가 없는 전과를 올렸다. 난 이게 절대적인 전력 열세 속에서도 조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한국군은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최강의 군대로 재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