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8월 14, 2011

해병대는 '상륙기동군'이고 싶다(동아일보 기사중)

사단과 6여단 경계 방어에만 투입 … 상륙부대 1사단은 장비와 인원 부족*

 
<북한 급변사태 시 신속히 북한을 안정화시키려면 해병대를 동원해 서해에 상륙하는 것이 유리하다.>
★7월 4일 인천 강화도에 주둔한 해병대 2사단(청룡) 예하 부대에서 한 소대원이 동료 네 명을 쏴 숨지게 하자 “소수정예를 자랑하는 해병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군을 안다는 사람들은 “구시대적으로 ‘악으로 깡으로’만 외치며 운영하니 그렇게 된 것”이라며 해병대 특유의 기수 문화를 비판했다. 1967년 베트남 짜빈동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군 연대의 공격을 막아내 외신에 ‘신화를 남긴 해병(Myth Making Marines)’으로 소개됐던 부대가 이 지경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현재 휴전선 방어에 투입한 육군 사단은 20여 개다. 이 중 10여 개가 휴전선을 지키는 전방관측소(GOP) 부대고, 나머지는 이들을 지원하는 예비 부대다. 휴전선 길이가 155마일(250여km)인 점을 감안하면, 육군 한 개 사단이 지키는 전선 길이는 대략 25km다. 국방개혁 2020 등에서는 GOP 사단의 작전구역을 가로 15km, 세로(종심) 30km로 정해놓았으니 육군 사단이 맡는 전선(가로 ) 길이는 20km 내외로 볼 수 있다.

육군 두 개 사단 구실해온 해병대 2사단

해병대 2사단이 맡은 김포·강화 지역은 육군 GOP 사단이 담당하는 지역과 조건이 다르다. 강화도와 그 부속도서인 교동도, 우도 등은 북한과 가까워 전 해안에 경계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 한강 하구도 북한을 마주보고 있으므로 전체를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섬의 해안선과 한강 하구를 더한 길이가 휴전선과 비슷한 250여km다. 물론 해안선이 구불구불해 길게 측정된 탓도 있겠지만, 해병대 2사단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해병대 2사단 예하 부대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진다. 분대가 들어가 지켜야 하는 섬이 있을 정도다. 이러니 기수를 따지는 병사 중심의 문화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군 구조개혁 방안인 8·18계획을 추진한 노태우 대통령 때도 해병대 2사단의 관할 지역이 너무 넓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됐다. 해병대는 상륙전을 해야 하는 부대이므로 김포와 강화는 육군이 지켜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래서 해병대 2사단을 빼내고 육군을 배치하려고 실사해보니 2.8개 사단, 적어도 두 개 사단을 넣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육군이 두 개 사단을 김포·강화 지역에 투입하면, 나머지 사단이 맡아야 하는 작전 지역이 넓어진다. GOP 사단은 물론이고 예비사단과 군단의 작전구역도 재조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해병대 2사단을 빼내는 것은 없던 일이 됐다. 그 후로는 ‘해병대는 용맹하다고 하고, 그 지역은 섬이 많으니 해병대가 지키는 것이 맞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해병대 2사단에서 사고가 일어나자 이러한 부담은 고려하지 않은 채 “운영이 구시대적이라서 그렇다”는 비판만 난무했다. 
한국군이 안은 고질 중 하나는 해병대를 육군처럼 운영한다는 점이다. 미국 육군은 분대를 9~10명으로 구성하지만 해병대는 12명 이상으로 편성한다. 따라서 같은 소대라도 해병대 병력이 더 많다. 미 육군 사단 병력은 1만2000여 명 정도지만 해병대 사단은 1만5000여 명 이상으로 구성한다. 이는 상륙전 과정에서 많은 병력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그러나 한국 해병대의 사단 병력은 육군 사단과 엇비슷하다. 


<해병대 용맹함 밖으로 증폭시켜야>

포항에 있는 해병대 1사단은 대한민국 유일의 상륙부대다. 그런데도 이 부대의 병력은 육군화가 많이 이뤄진 해병대 2사단보다 적다. 전략 예비부대라는 이유로 전선을 맡지 않아, 예하 부대를 여러 곳으로 파견했기 때문이다. 해병대 1사단은 유사시 북한 중허리로 상륙해 제2전선을 형성해야 한다. 그런 만큼 항상 완편(完編)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상륙전을 못할 정도로 부대를 줄여놓았다. 해병대의 육군화를 막고 상륙전 기능을 회복하는 것은 중요한 국방개혁 사안이지만 이명박 정부는 우선순위를 뒤로 미뤄놓았다.

해병대는 용감하다는 이유로 전력 증강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해병대는 상륙전을 하는 기동부대이므로 육군의 기계화부대 이상으로 좋은 장비를 갖춰야 하는데 거꾸로 갔다. 해병대 부대에는 육군에서는 보기 힘든 구식 장비가 즐비하다. 유일한 예외가 해병대 6여단과 연평부대에 제공한 K-9 자주포다. 6여단과 연평부대는 10여km 이상 바다를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으니, 사거리가 10km 이상 되는 포를 보유해야 한다. 155mm포와 한국형 방사포인 ‘구룡’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 군 수뇌부는 육군이 다수인 탓인지 ‘군단에는 155mm포, 사단과 여단에는 105mm포’ 식으로 정형화한 포 배분론을 신봉한다. 이 때문에 해병대 6여단에는 북한 땅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105mm포를 제공했다. 이 문제점을 꿰뚫어본 이가 조성태 전 국방부 장관이었다. 1999년 명품 155mm 자주포인 K-9이 생산되자 당시 장관이던 그가 백령·연평도에 이 포를 먼저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 덕분에 지난해 11월 북한군이 연평도로 포격을 퍼붓자 연평부대는 K-9을 쏘며 반격할 수 있었다. 그의 선견지명이 없었다면 이날 연평부대는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조 전 장관 같은 정책결정권자의 배려가 극히 이례적이라는 사실이다. 

예상 가능한 북한 급변사태 중 하나는 북한 내전이다. 북한내전이 벌어지면 신속히 군대를 파견해 안정화해야 한다. 내전은 권력 핵심 부서가 있는 평양에서 일어날 확률이 가장 높으므로 평양부터 점령해야 한다. 휴전선에 배치한 육군의 기계화사단이 평양까지 달려가려면 조밀한 북한군 방어망을 뚫고 200여km를 달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과 교전이 없으리라고는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해병대를 파견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동강 하구로 상륙한 해병대는 50여km만 주파하면 평양에 닿을 수 있다. 

백령도 등 서해 5도는 이러한 상륙전을 지원하는 전진기지가 돼야 한다. 해군도 강력한 상륙전 세력을 갖춰야 한다. 해군의 전투부대는 함대→전단→전대 순으로 작아진다. 1980년대 해군은 전단 규모의 상륙전 세력을 보유했지만 지금은 전대 수준만 갖고 있다. 미군은 비상시에 대비해 상륙전용 함대를 만들고 이 함대에 해병대 대원과 장비를 항상 태워놓는다. 한국은 아시아 최대의 상륙함이라는 독도함을 갖고 있지만, 해병대와 해병대 장비를 전혀 태워놓지 않는다.

해병대를 정상화하려면 먼저 해병대 1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보완해 완편 상륙사단으로 만들어야 한다. 김포·강화 지역 방어는 육군 사단이 맡고 해병대 2사단은 후방으로 빼내 완편 상륙여단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 확보한 여력으로 기동헬기를 운영할 해병대 항공여단을 창설해야 한다. 현대 상륙전에선 기동헬기가 필요하니 해병대는 반드시 항공여단을 가져야 한다.

끈끈한 전우애를 가진 해병대를 넓은 지역에 펼쳐놓는 것은 올바른 활용법이 아니다. 해병대는 한곳에 모아놓았다가 유사시 쓰나미처럼 돌격상륙하는 전략군으로 써야 한다. 해병대의 올바른 활용을 무시한 국방개혁안은 다시 짜여야 한다.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금요일, 8월 12, 2011

"45년전 135명이 무임승차한 기차값입니다"

[레벨:16]배나온슈퍼맨
2011.08.13 02: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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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과 해병대의 난투극을 다룬 조선일보 1966년 8월 9일자 7면 기사‘. 장교 30여명을 입건’이라는 제목이 붙었다.老해병들,

코레일 찾아 66년 공군과 집단 난투극 때 진해~김해 운임 1만125원을 지금 시가로 환산해 납부1966년 8월 6일 오후. 부산으로 휴가를 나왔다 귀대하는 해병 간부후보생 7명이 버스를 타고 가다 구포에서 공군 김해 비행학교 조종 학생 10여명과 시비가 붙었다. 처음엔 해병들이 공군 장교를 끌어내려 폭행한 뒤 버스를 타고 떠났으나, 30분 뒤 공군 트럭 2대가 버스를 가로막았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공군 장교 30여명이 트럭에서 내려 몽둥이로 버스 창문을 부순 뒤 해병들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해병 소위 2명이 다쳤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해병 간부후보 동기생 135명은 이튿날 밤늦게 회의를 가졌다.
"해병대가 공군에게 맞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 결국 이들은 8일 새벽 김해 비행학교를 습격하기로 하고 몰래 부대를 빠져나갔다. 이들은 공군부대로 가기 위해 경남 진해경화역에서 김해 진영역까지 돈을 내지 않고 열차를 탔다. 급하게 가느라 돈을 가져가지 않아 "무임승차는 곤란하다"는 역무원에게 일단 시계 10여개를 맡기고 우겨서 탔다. 135명이 탔으니 1인당 75원씩 1만125원을 내지 않았던 셈이다.
동이 트기 전 공군 기지에 난입한 이들은 눈에 보이는 공군 장교들을 마구 폭행한 뒤 허리춤에 손을 얹고 군가 '나가자 해병대'와 '청룡은 간다'를 불렀다. 당시 습격을 주도한 장교 중 하나가 나중 해병대사령관에 오른 전도봉 소위였고, 공군 부대 당직 사관은 나중 국방부장관이 된 이양호 대위였다.
공군도 가만있지 않았다. 군가를 부르며 호기를 부리던 해병들에게 장병 200여명이 무기를 들고 뛰어왔다. 사태가 커질 것을 우려해 퇴각하던 해병들은 철조망을 넘고 늪지대를 헤엄쳐 빠져나가다 1명이 익사해 숨졌다. 싸움 과정에서 해병과 공군 합쳐 48명이 다쳤다. 나중 자매결연하며 화해하긴 했지만 전원이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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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군과 해병대는 1966년 난투극 이후 자매결연해 사태를 수습했다.‘ 축 자매결연’이라는 글씨 밑에 악수하는 손 그림이 눈길을 끈다. /해병대신문 제공'8·8 습격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의 주역인 해병 예비역들이 45년 만에 마음의 빚을 갚기로 했다. 11일 오후 3시 30분쯤 서울 용산구 서울역 뒤 코레일(한국철도공사) 서울지사에 노(老)해병 3명이 나타났다. 이들은 1966년 임관한 해병 간부학교 35기 동기생들. 45년 전 기차 삯을 치르기 위해 코레일을 방문한 것이다.
김무일(68) 해병 간부후보 35기 동기회장(전 현대제철 부회장)은 "철없던 행동으로 본의 아니게 손해를 끼친 점을 사과한다"며 100만원을 허준영 코레일 사장에게 건넸다. 100만원은 당시 운임 1만125원을 지금 시가로 환산한 금액이다. 김 회장은 "40년 넘게 정신없이 살다보니 지난날 잘못을 바로잡지 못했다"며 "올해 임관 45주년을 맞아 동기들이 모여 이번 일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이위재기자>

화요일, 8월 09, 2011

해병대 기수 줄인다…내년부터 월 1개 기수씩만

[레벨:16]배나온슈퍼맨
2011.08.09 13:41:56
해병대가 매월 2개 기수를 선발하는 기존 방식을 바꿔 내년부터는 1개 기수씩을 선발해 기수 차이에서 발생하는 갈등 소지를 줄이기로 했다.

또 병사 신상분류 등급을 세분화해 관리를 강화하는 등 병영 내 부조리 척결에 주력하기로 했다.
해병대는 9일 브리핑을 열어 지난달 초 발생한 해병2사단 총기사건 이후 추진 중인 병영문화 개선 내용을 발표했다.
해병대는 우선 입대 인원은 그대로 하되 기수를 월 2개 기수에서 내년부터 1개로 통합해서 선발하기로 했다.

해병대 김태은 정훈공보실장은 "기수문화의 부작용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라면서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동기생이 늘어나고 기수 간 입대시기가 한 달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 기수 차이 간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이 완화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한 번에 입소하는 인원이 두 배로 늘기 때문에 예산 등을 고려해 내년 1월 시행하는 방안으로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함께 병사에 대한 관리도 강화하기로 했다. 우선 병사 신상분류 등급 기준을 현행 3개에서 A¤D 4개 등급으로 세분화하고 D급에 대한 관리책임은 기존 대대장에서 연대장으로 확대 부여하기로 했다.

또 보호관심 병사를 관리하기 위해 '병역심사 관리대'를 별도로 설치, 운용할 계획이다. 이는 현장 지휘관의 지휘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것으로 병역심사 관리대 운용부대는 해병대 사령부 산하에 설치될 예정이다.

이와함께 인성 결함자들의 입대를 차단하기로 했다. 가 입소 기간을 포함한 총 7주간의 신병훈련 기간 중 실시하는 인성검사에서 이상소견을 받은 대원은 정밀 진단 후 귀가조치하기로 했다. 이 같은 방식에 따라 지난달 22일 입대한 1146기에서 35명이 귀가조치됐다.

훈련 기간 귀가한 사람은 지난해 2명, 올해는 6월까지는 9명에 불과했다.

해병대 사령부는 병영문화 혁신에 관한 일반명령을 전 부대에 시달하고 지난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일반 명령은 해병대 명예와 긍지, 신뢰를 실추시키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기수문화가 선임을 존경하고 후임을 사랑하는 건전한 병역문화로 발전돼야 하며 선ㆍ후임 간 군대예절을 준수할 것을 지시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빨간 명찰을 회수하는 한편 소속부대원 전원을 인사조치하고 간부를 엄중 문책하기로 했다.
<동아닷컴 디지털뉴스팀>

 
해병대 월 1개 기수 체제로…탄약고엔 CCTV 설치
 
 
해병대가 병 기수 서열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월 2개 기수를 양성하는 현 체계에서 월 1개 기수를 양성하는 체제로 달라진다. 또 빨간 명찰 회수 인원들에 대해서는 일정기간 적응 및 재활교육을 실시, 개선 여부를 판단한 후 빨간명찰 재수여식을 실시할 계획이다. 아울러 상황실 내 간이탄약고에 대한 CCTV 및 지문인식 열쇠 등 자동잠금장치가 설치돼 총기관리가 대폭 강화된다.
해병대는 2사단 총기사고 후속조치로 이 같은 내용의 해병대 병영문화 혁신을 위한 갖가지 방안들을 수립했으며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지속적으로 평가 관리하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해병대는 이를 위해 ‘해병대 병영문화 혁신추진단’을 편성, 전담기구로 운용 중이며 지난 1일부터 해병대 병영문화 혁신을 위한 일반명령을 시행하고 있다. 일반 명령에는 병 상호 간의 명령을 금지하고 해병대원의 기본 권리와 의무 및 ‘빨간명찰 회수’ 등 처벌 규정을 담고 있다.
해병대는 새로운 병영문화 조성, 군 기강 확립을 위해 추진해야 할 22개 과제를 선정, 이 중 17개 단기과제는 지난달 시작한 ‘병영문화 혁신 100일 작전’에 포함해 오는 10월 14일까지 모두 완료할 예정이다.
<헤럴드경제 김대우 기자/dewkim@heraldm.com>

월요일, 8월 08, 2011

해병 소령 이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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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표 제 목  이인호 소령
작 성 자 전쟁기념관
감 수 자 전쟁기념관
발 행 일 2004/10/18
갱 신 일
요 약 정 보
 
상 세 설 명
 
1. 생애(1931 - 1966)
  1931년 7월 2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386번지에서 출생한 해병 소령 이인호는 1953년 3월 23일 대구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운의 뜻을 품고 1954년 4월 10일 해군사관학교 제11기로 졸업, 해병소위(군번 83496)로 임관하였다. 임관 후 1959년 미 상륙전학교를 수료하였으며 1960년 미 해병대 상륙전부대훈련과정(LFTU)을 이수하고 1964년 육군공수특전교육 및 수중폭파훈련(UDT)과정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해병대 제1상륙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65년 해병대 제2여단 작전보좌관으로 근무 후 부인 이경자 여사와 1남 1녀의 자녀를 뒤로하고 자유의 십자군으로 월남에 1966년 파병 해병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장교로 참전하였다.
  1966년 8월 11일 14:20시에 월남전선 「투이호아」지구 해풍작전에서 체포한 여자 베트공으로부터 입수한 첩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1개조(4명)를 지휘 동굴수색 중 적이 수류탄을 투척해오자 대원들에게 “수류탄이다 엎드려라”지시하면서 투척해온 수류탄을 베트공이 있는 쪽으로 집어던지고 또 다시 날아온 적의 수류탄이 부하 대원들이 집결된 지점에 투하되어 폭발하려는 순간 다수대원들의 생명이 위험함을 알고 구출하기 위한 일념으로 수류탄을 껴안고 현장에서 장렬히 산화하였는바 이는 오직 그의 숭고한 살신성인의 희생정신과 투철한 군인정신의 발로로서 자유 우방 전 장병의 표상이 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소령으로 1계급 특진과 군인으로서 최고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또한 미국정부에서도 은성무공훈장을, 월남공화국에서는 엽송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이인호 소령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해병대에서는 장교들의 성금과 사회각계각층의 성금으로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와 해병교육기지인 진해에 동상을 건립하여 그의 유덕을 추모하고 그의 군인정신을 끝까지 길이 남게 하였다.
  고 이인호 해병소령의 동상을 1967년 3월 22일 교육사령부 영내인 경남진해시 경화동 1105번지에 해군교육사령부에서 경내면적 66평, 기단높이 0.5m, 동상높이 7.1m로 건립하였으며 건립취지는 1966년 8월 11일 월남「투이호아」지구에서 해풍작전 수행 중 부하들의 생명을 구하고 폭사한 군군영웅 이인호 소령의 살신성인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건립동상의 비문에는 「그대 만리이역 월남 동굴에서 가슴에 수류탄을 안고 산화하던 날, 하늘도 무심치 않아 비를 내렸다. 얼마나 조국을 사랑했기에 청춘도, 정든 임도 즐거이 바치고 아아! 스스로 장렬한 폭사를 하였다. 대륜은 충효라 스스로 속이지 않고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 가르쳤거늘, 그대 아아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했구나. 그대 뿌린 씨가 천배 만배 될지니, 나라도 사랑 먹고 자라나기 때문이라. 흐르는 눈물이 오히려 그대에게 부끄럽구나.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가족들의 통곡하는 사연을 차마 못 들을레라. 천정을 향하여 나는 눈만 껌벅이고 있다. 그대 몸은 부서져 가루가 되고, 피는 흩어져 이슬이 되었거니, 타는 불이어 이 가슴마저 태워다고. 그대를 지아비라 아빠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전우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이용사여 조국의 영웅이여 고이 잠들라. 그대를 제자라 형제라 부를 수 있고, 그대를 동포라 부를 수 있는 자의 영광이여, 아 아 용사여 대한의 샛별이여 길이 복되라. - 한솔 이효상(국회의원) - 조. 이인호 소령」라고 쓰여 있으며 해군사관학교에서는 매해 이인호 소령동상 앞에서 인호제가 거행되고 있다.
  고 이인호 소령의 애국 충정과 살신성인의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거행되는 인호제는 해군사관학교장을 비롯하여 각급 해군, 해병 지휘관, 유가족 및 4학년 생도가 참석하여 고인의 공적을 기리는 추도문과 결의문을 낭독하며, 헌화와 분향을 하여 고인을 추모한다. 고인의 살신성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67년에 이인호 소령 동상을 건립하였고, 1977년부터 매년 인호제를 거행해 오면서 해군사관생도들이 고 이인호 소령의 희생정신을 계승할 것을 다짐해 오고 있다.

2. 공적
  「해풍작전」은 1966년 7월 22일부터 8월 17일까지 실시한 작전으로 여단이 「캄란」에 상륙한 이래 이른바 공산군의 백년아성으로 악명 높았던 「투이호아」지역 및 「히에우 수옹」평야일대에 은거하며 약탈행위를 자행하여 온 적의 주력을 격파(청룡 제1, 2 및 재건 제1, 2호 작전을 전개)하여 평정지역을 확대 확보한데 이어 그 잔적들을 수색 - 격멸함으로써 전 여단병력을 「투이호아」에서 추라이(Chu Lai)로 이동하기 위해 작전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아군의 공격으로 와해되었던 적은 월맹군 제325사단 95연대 및 18연대 예하의 2개대대와 베트공, MF 제30대대 예하의 4개 중대규모의 지방 베트공인데, 특히 이들 적은 이 지역에서의 식량의 보급원을 상실하였을 뿐만아니라, 소위 월맹군 - 베트공 간의 연합전선이 와해됨으로써 각종 군수물자의 보급과 병력보강능력을 상실케 되어 아군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가운데 소규모 게릴라 전법으로 그 돌파구를 모색코자 광분하고 있었다. 이번의 주 작전지역은 적의 약탈이 극심한 취약지역인 동시에 「히에우 수옹」평야는 면적이 140㎢로써 월남의 3대곡창(연간 110,000 톤의 양곡생산)중의 하나인데, 이 일대는 무수한 대소하천이 흐르고 있어 관개시설이 양호하며 습지를 제외하고는 논밭의 경작하기 가장 좋은 지역으로 주민들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따라서 여단은 「재건2호 작전」종료롸 동시에 7월 22일 08. 00시를 기하여 제1, 3대대를 각각 헬기공수로 작전지역에 투입하였다. 제1대대는「카우 송 반」산 북동쪽과 「지욱 킨」산 북쪽 및 「미케」(1)지역에 제3대대는 북서쪽「다란강」남안에 투입하여 동쪽으로 북상하면서 적을 소탕하는 일련의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제1대대와 제3대대는 소규모 전투는 있었으나 큰 피해없이 베트공 은거지역을 하나하나 점령하고 그 은거지역에 숨은 적을 소탕하면서 7월 31일까지 작전을 종결하고 7월 22일부터 제3대대는「두더지3호 전투」를 전개하여 제9, 11중대 피해없이 적을 소탕하고 소화기은닉처를 발견하여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모아랜드(W.C. Westmoreland) 대장의 격려 메시지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탁반」(Thach Ban)전투를 7월 25일부터 제3대대가 전개하였다 「탁반」전투는 7월 24일「탁반」(5)일대에 베트공 1개소대 규모가 준동하고 있다는「탄미」(Tan My)지역에서 체포된 베트공 용의자의 진술을 분석한 끝에 제1중대로 하여금 7월 25일 07. 00시를 기하여 수색정찰을 전개토록 하여 적 사살 5명, 포로 1명을 압송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7월 29일부터 8월 8일에 돌풍 제1호전투를 제3대대 10, 11중대가 수색정찰을 실시하여 천연동굴을 파괴하고 수류탄과 대인지뢰 4발을 노획하였다. 다시 8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돌풍 제2호 전투」를「히에우 수옹」평야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미레」부락 근처에 자동화기와 소총으로 무장한 지방 베트공 25명이 주간에는 농부로 가장하고 있다가 야간에는 폭도로 돌변하여 이 부락 일대를 활보하면서 기습과 약탈 행위를 일삼고 있다는 첩보에 따라 본 수색전을 실시하게 되었다. 작전지역 상황은 「히에우 수옹」평야 중앙을 「반라이」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으며 「미레」(1)(2)(3)(4)부락 동남쪽에는 표고 216m의 「차이」산이 우뚝 솟아있어 아군의 활동을 감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부락 및 논밭사이에는 무성한 숲으로 이루어져 관측과 사계를 제한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반라이」강의 소하천과 주변의 습지 및 웅덩이 그리고 개활지 등은 아군의 기동에 장애요소가 된 반면에 방어하는 적에게는 유리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락은 수차례에 걸친 아군의 수색전과 포격 등으로 파괴된 농가와 폐가옥으로 남아있어 얼핏 황폐화된 전장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였으나, 이 같은 정경은 오히려 잔적들의 암약에 유리할 듯 판단되었다. 당시의 적정은 작전지역내에서 체포된 베트공 용의자들의 제보에 의하면 지방 베트공 잔당(25명으로 추산)이 「미레」부락 주변의 숲속에 거점을 확보하고 천연동굴속에 무기와 탄약 등을 은익하고 있다가 수시로 무장을 갖추어 기습을 감행한 강도의 행각을 서습치 않고 있다는 공통된 첩보이다. 그리고 이들 잔존 베트공에 대한 증원세력은 주변에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간 중 기상개황은 평균 39℃의 무더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비교적 청명한 날씨에다 북동풍이 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따라 대대장 이효갑 중령은 9일 19:50시부터 각 중대별 소대단위로 공격목표「미레」주변을 포위하기 위한 야간 매복에 이어 10일 06:00시를 기하여는 제9중대를 주력으로 삼면협공에 의한 수색과 소탕전을 전개토록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9일을 D일로 하여 제9중대는 18:35시에 중대기지를 출발하여 제1소대가 「미레」(1) 서북쪽 500m 지역에, 또한 제2소대가 「미레」(4) -「푸락」(2)지역에, 그리고 제3소대가 「푸락」-「수안 틴」(1)지역에 각각 진출하여 매복호를 구축함과 동시에 주변 일대를 수색끝에 야간매복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제10중대는 19:05시에 중대기지를 출발하여 제2소대장 변봉준 중위의 지휘아래 제2소대로서 제9중대 지휘소를 확보함과 동시에, 제3소대가 제9중대 2소대의 우측방인 「푸락」남쪽에서 야간 매복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날 각 매복조가 배정된 위치에서 철저한 사주경계 아래 적의 침투를 포착코자 주력하였으나 아무런 적정을 발견하지 못한 가운데 철수하였다.
  8월 10일 06:00시를 기하여 제9중대 제1소대장 권기옥 중위는 전날의 매복지역으로부터 동북진하면서 「미레」서쪽-「수안 틴」서쪽을 수색하고, 제2소대장 이윤호 중위는 「미레」-「푸락」에 이르는 매복지역으로부터 서북진하면서 「푸락」(1)-「푸락」(2)지역을 각각 협공으로 수색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제10중대 2소대(-), 1분대 이기원 중사는 제9중대를 엄호하기 위하여 중대 지휘소를 출발하여 「미레」(1) 동북쪽-「수안 틴」(1) 서쪽 고원지대에 연하는 소로를 차단하는 한편, 제3소대장 조영진 중위는 「미레」(4) 북쪽-「수안 틴」(2)에 이르는 3등 도로변에서 차단임무를 각각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삼면포위망을 형성하고 축차적인 수색으로 압박하던 중 07:30시에 최초로 제9중대 3소대의 수색로이었던 「푸락」(1)부락 입구에서 아군의 수색대를 발견하자 주변 농가쪽으로 황급히 도피하는 베트공 첩자 1명을 제2분대 한재구 병장이 위협사격 끝에 체포하였는데, 이 자는 의약품을 다량으로 휴대하였는가 하면 상세한 이 부락 일대의 지도를 소지하고 있었다.
  또한 제1소대는 「미레」(1)-「미레」(4) 구간을 탐색 중 08:40시에 이 부락을 연결하는 소로상에서 군용 수통을 휴대한 거동이 수상한 남자 3명과 여자 1명을 검색한 결과 괴문서와 의약품 등이 색출되자 대대 지휘소로부터 직접 본 작전에 참가하였던 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가 현지에서 신문(월남 통역인 대동)한 바 베트공첩자로 판명되어 이 자들을 앞세워 베트공 은거지로 알려진 「미레」(1) 서쪽 300m지점에서 천연동굴 1개소를 발견하여 내부에 숨어있는 2명의 여자 베트공 용의자를 추가 체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날의 수색결과는 베트공 첩자 7명을 포로로 한 것을 비롯하여 이들이 휴대하고 있던 의약품과 불온문서 등을 압수한 가운데 각 소대는 일몰과 더불어 수색현지에서 야간매복으로 들어갔다.
  8월 11일 대대장 이효갑 중령은 베트공첩자들이 「미레」(1)지역 주변에서 7명이나 체포되었고, 특히 2명의 여자첩자들은 모두가 베트공 가족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예의 중요시하고 예하 참모들과 철야 심문한 끝에 베트공 잔당의 은거지와 무장병력규모 및 활동실태 등을 파악하게 되었다. 즉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베트공 핵심분자 5, 6명이 「미레」(1)부락 서북쪽 150m 지점의 대나무 숲속에 은폐된 지하동굴을 거점으로 하여 칼빈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주변일대에서 기습과 폭력을 일삼고 주민들의 식량과 재물을 약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효갑 중령은 제9중대 1소대와 3소대로 하여금 08:00시를 기하여 이 동굴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제10중대 2소대와 합세하는 즉시 일제히 삼면협공을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대대 정보장교 이인호 대위는 이 지역을 숙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날 베트공첩자들의 제보를 직접 검토 분석하였던 담당관이므로 본 동굴 수색전에 참전시켜 줄 것을 건의하여 승낙을 받고 즉시 헬리콥터편으로 여자 베트공 첩자 2명과 월남인 통역인을 대동하고 제9중대 1소대의 수색지역에 강습착륙하여 동굴탐색을 진두지휘하였다. 그리하여 14:15시에는 목표지역의 지하동굴을 베트공첩자들이 안내한대로 대나무 숲속에서 발견하여 제9중대 1, 3소대로 하여금 동굴 주변을 전면포위토록 하는 한편, 베트공 첩자 2명을 앞세우고 제1소대 3분대장 김찬옥 하사 외 4명과 함께 동굴 입구로 진입하였다. 그런데 이 동굴은 입구의 직경이 70㎝, 길이가 10m로 지하 깊숙이 곡선으로 통로가 구축된 “T”자형의 바위 인공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도는 순간, 이인호 대위는 우선 김찬옥 하사로 하여금 동굴 내부에 3개의 수류탄을 연속투척하여 반응을 확인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으므로 5분후에 김찬옥 하사를 선두로 분대원 고인원 병장과 이종길 병장 그리고 곽찬연 상병과 김수진 상병을 뒤따르도록 하여 동굴속으로 진입케 하였던 바, 동굴내에 흩어져 있는 수류탄 3발, 소총실탄 137발, 권총실탄 6발, 구급낭 2개, CAR 탄띠 1개, 중기관총 탄약통 1개 등을 노획하고 나왔다. (동굴 내부는 겨우 물체를 식별할 수 있는 정도의 암굴) 이에 이인호 대위는 얼핏 석연치 않은 예감을 느꼈는데 그 까닭은 베트공 첩자들이 제보한 내용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까지 수차례의 작전을 통하여 자신의 정보판단이 추호의 차질이 없었고 또한 본 동굴수색전에 시종 참가함으로써 제반첩보를 종합분석 끝에 진행되고 있는 작전인 만큼 더욱 의심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인호 대위는 직접 1개조 4명을 이끌고 동굴 내부를 재확인하면서 5m 전방까지 진입하였을 때, 동굴이 좌측방으로 좁게 굴곡이 되어 있어 “굴이 또 있구나” 하면서 계속 진입하려던 찰라, 갑자기 수류탄 1발이 날아들었다. 이때 이인호 대위는 뒤따르던 대원들에게 “수류탄이다! 엎드려라!” 하고 외치면서 날아든 수류탄을 재빨리 집어 적이 있는 방향으로 던져서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재차 날아든 1발의 수류탄은 미처 집어던질 여유가 없어 이 한맺힌 흉탄을 안은 채 장렬히 폭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뒤따르던 부하 김찬옥 하사 외 3명은 위기일발의 사지에서 구출되었는데 이때가 14:40시이었다. 그러자 분노에 서린 대원들은 사생을 초월하여 소화기 사격과 수류탄을 연속 투척하면서 공격하니 적은 실로 아수라의 참상속에 비명소리만 들렸다. 얼마 후 소연과 사체의 냄새로 가득찬 동굴속을 수색한 결과 현장에는 피에 물든 베트공 사체 5구와 칼빈소총 2정, 실탄 7발, 수류탄 7발, 야전침대 1개, 라디오 1대, 휴대용 전지 2개, 손목시계 2개, 그 밖에 약간의 의약품과 식량 등이 파괴 또는 소각된 채 흩어져 있었다. 이윽고 이 동굴 폭파전을 못내 끝맺지 못하고 산화한 이인호 대위의 유해는 곧 이어서 구조 헬리콥터편으로 대원들의 울분과 애도속에 대대 지휘소로 이송되었으며, 이어서 “마의 동굴”을 TNT로 산산조각을 낸 후 17:00시를 기하여 각 중대가 기지에 복귀함으로써 본 수색전은 매듭을 지었다.
  그런데 이역만리 월남전선에서의 탁월한 정보장교의 전사는 상승해병의 슬픔이오, 우리 한국군의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강건한 투혼은 동시에 우리 국군의 귀감으로서 대공전선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불굴의 표상이었다. 대대 정보장교이었던 이인호 대위는 평소 과묵하고 통찰력이 풍부한데다가 예민한 정보판단능력을 발휘하여 여러 작전에 공헌한 바 공적이 지대하였던 해사(제11기) 출신의 우수한 장교이었다. 그의 전사소식이 국내에 알려지자 국민들은 한결같이 애도와 추모의 뜻을 표하였으며 장례도 해병대장으로 엄수하여 국군묘지에 안장되었다. 또한 해병대에서는 장교들의 성금과 사회 각계각층의 성금으로 모교인 해군사관학교와 해병교육기지인 진해에 동상을 건립하여 고인의 유덕을 추모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소령으로 1계급 추서함과 아울러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또한 미국 정부에서도 은성무공훈장을 전달하고 장렬히 전사한 고 이인호 소령의 명복을 빌었다.

일요일, 8월 07, 2011

금요일, 8월 05, 2011


"한번 개병대는 영원한 개병대"




어느 개병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동네 친구들도, 동네 사람들도 그를 무척 싫어합니다.
개병대는 너무 거칠다고 ,너무 안하 무인이라고,

너무 고지식하다고, 너무 똥폼을 잡는다고
오히려 그에게 욕하고 왕따를 시킵니다.

"개병대" 동네에 3명의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땅개", "참새","물개"라는 친구들입니다.


어느날 동네 친구들이 다른 마을의 깡패들에게 처참하게 맞고 왔습니다.
세 친구 모두 인사 불성이 되도록 맞았습니다.

동네 친구들은 무서워서 동네 밖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마을에 깡패들이 그들만 보면
몹시 괴롭히고 못된 짓만 일삼습니다.

어느날 동네 친구 셋이서 그 동네 "개병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봐 개병대 우리와 함께 저기 동네 구경 안갈래?.

저기 동네에 가면 이쁜 아가씨들도 많고 좋은것도 아주 많다네"
하면서 "개병대"에게 같아 가지고 꼬십니다.

개병대는 정말 친구들이 고마웠습니다.
자기와 함께 어디 가자고 하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병대에게는 할 일이 있어서 같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실망하면서 이웃 동네에 갔습니다. 이웃 동네 깡패들이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친구들 앞을 가로 막는 이웃 동네 깡패들이 나타났습니다.
역시 친구들은 그들에게는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개병대는 그래도 친구들이 자기와 함께 같이 가자고 한게 고마워서

하던 일을 멈추고 이웃 동네로 뛰어 갔습니다.
개병대 눈에는 동네 친구 들이 이웃 동네 깡패들에게 처참하게 깨진 모습만 보였습니다.

개병대는 친구들이 더 이상 맞는게 싫어서 나서기로 했습니다.
비록 친구들이 자기가 나서는걸 싫어 할지라도 ......,

이웃 동네 깡패들은 개병대의 상대가 되질 못했습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덤벼 들어도 개병대는 결코 물러 서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고 오히려 투지가 더 살아 나는 것이었습니다.

수적으로도 열세 였지만 그들은 결코
개병대의 적수가 될수 없었습니다.
개병대는 깡패들로 부터 친구들을 무사히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친구들이 오히려 자기들을 도와준 개병대에게 따지고 묻습니다.
너 아니었어도 우리들 끼리 저 깡패들을 물리 칠수 있었다고.
모두 다 개병대 때문에 망쳤다고 오히려 짜증을 내고 면박을 줍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 친구들을 미워 하거나 싫어하진 않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친구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깡패가 나타나서 행패를 부리면 그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은 개병대을 부릅니다.
저 깡패들을 상대할 사람은
너 밖에 없다고 감언 이설로 설득을 시켜서 내 보냅니다.
그는 그 친구들을 위해 동네 사람들을 위해 대신

그 무시무시한 깡패들과 피 터지게 싸우고 망신창이가 되어도
사랑하는 친구들을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 단 한발짝도 물러 서지 않습니다.
저 친구들에게는 그가 마지막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는 말이 있듯이
동네가 깡패들로 부터 조용해지깐
이젠 개병대가 필요없다고 개병대 보고 이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라고 합니다.
아니면 이름을 바꾸고,삶의 방식도 바꾸고,바보처럼 멍청이 처럼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강요합니다.
이제 더이상 필요없고 거추장 스럽다고 다시 동네에서 자기들의 입지가 난처해지는걸 ,

아주 싫어하는 아주 못된 친구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동네 친구들은 개병대가 두렵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고 ,이웃 동네 깡패들도 두려워 하는 그 개병대를 더 무서워 합니다.
언제 그 거친 행동을 자기들에게, 동네 사람들에게 할지 모른다고.
만에 하나 개병대가 약간 실수만 하면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듯이 일제히 들고 일어 납니다.
개병대 때문에 불안해서 살수 없다고.....,

이제는 개병대의 생활 습관까지 간섭하고 나섭니다.
개병대의 하는 행동 하나 하나 간섭을 합니다.

만약 자기 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지 않으면

모든 편의 시설및 생활 보장을 일체 제한 하겠다고
어름장을 놓습니다.

이 개병대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친구들의 말대로 모두 따라서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젠 그 친구들이 그 개병대의 행동과 생활 습관을 자기들이 모방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개병대가 하던 옷 차림 ,행동, 습관등등 ....,

하지만 그 개병대에게는 하지 못하게 합니다.
더 더욱 못하게 합니다. 개병대의 과거의 모습을 모두 지우려고 합니다.


더이상 개병대은 그들의 보호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의 쫄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더럽고 힘든 일만 맡아서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개병대에게는 연장하나 제대로 된걸 주지도 않습니다.

사용하는 연장에도 일일이 감시하고,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어쩌면 두번 다시 동네에서 개병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도
아무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의 친척들 뿐입니다.

개병대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그 동네를 떠나라고 할까요?

그러면 이웃 동네 깡패들이 다시 처들어 오면 어떻게 할까요?
그때 가서 다시 개병대를 다시 이사 오라고 해야 할까요?


이웃 동네에서는 깡패들을 더 더욱 강인하고 난폭하게 키우고 있는데
이 동네에서는 오히려 그들과 맞설수 있는 개병대를 내 쫓으려 하고 있습니다.

동네가 다 망가지고 망신창이가 되고 나서 개병대에게 너무 했다고
후회해야 하는지 ......,




--- 첨부 ---



초기 해병대창설후 대대,연대급 인력으로 부대의 가치를 높이는일은 승리하는거였다.

삼군보다 앞서서,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무조건 이겨야만 소부대의 가치를 인정받는것.



육군,해군,공군,해병사령관의 계급은 같았었다.

어느순간 해병대사령부를 해체하더니, 사령관의 계급도 한단계 떨어뜨렸다.

해군에서 UDT를 뺏어가더니, 이번엔 육군에서 공수부대를 뺏어갔다.



세무워카를 바꾸려하고, 상륙돌격머리를 바꾸려하고, 순검도 없앨려고한다.

사령관은 계급에밀려서 이리채이고 저리채이고 눈치를 볼수밖에 없다.



전역자들과 현역들이 힘을보태니, 사령부가 다시생겼고,

없애려는 여러가지전통을 다시 지킬수있었다.



전쟁때는 사람잘죽인다고 표창도많이해주고, 중대전체가 1계급특진할정도로대우해주더니

뒤도돌아볼수없는 상륙전이기에 죽이는법과 악과깡만 2년동안 교육시키더니

이젠 사회에서 혐호감이든다며, 없애려고한다. 지들이 그렇게 가르쳐놓고 어쩌라고 ~



해병대를 반으로잘라서, 반은 전쟁시 김포와 백령도의 총알받이로 ,

반은 포항에서 존내 훈련만시키다가 상륙전에 총알받이로 던져놓을려고하고

김포 1개사단은 육군 6개사단이 감당해야하는지역 맡으라고 던져놓고 ~

특수부대는 월급이나받지, 한달2만원받는 해병들 먹는거나 잘주든가 ~

상륙시 5% 내외의 생존률로, 편재상 의무병도없는 등신같은 해병대!!!!


사령부는 있으되, 상륙할 배하나 공군지원할 비행기하나없고,

사령관은 있으되, 계급에 밀려 제목소리도 못내고

해병대는 있으되, 해군에서 콩고물받아 생활해야하고

개병대는 있으되, 악과깡만 길러놓고 혐오스럽다고 꺼지라하고


더 어떻게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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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8월 02, 2011

[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월맹군, 1개 연대가 청룡(파월 해병대) 1개 중대에 궤멸되자 "한국군 피하라" 지령

입력 : 2011.08.02 03:03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下·끝]
당시 美 언론들 극찬 - "2차대전 후 최고의 승전보"… 닉슨 대통령도 나서 "쾌거"
강군 토대 닦은 베트남戰 - 64년부터 8년간 31만명 파병, 맹호·청룡부대 등 승리 신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지려는 혈전(血戰)이 전쟁 말 곳곳에서 벌어졌다. 텍사스고지, M1고지 전투가 그 대표적인 현장으로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1953년 7월 27일, 3년 2개월에 걸친 포성(砲聲)이 멈췄다. 당시 나는 60연대장이었다.

1948년 제주 4·3사건부터 시작된 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 5년을 넘겼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65년 3월 김용배 육군참모총장이 나를 호출했다. 육군작전참모부장으로 발령 내면서 1964년 터진 베트남전 연구를 지시했다.

좌익·종북주의자들은 지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미제의 용병'이라 폄하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 미2·7사단을 빼려 했다. 당시 미군 1개 사단 전력은 국군 수개 사단에 맞먹을 만큼 강했다.


베트남에 파병된 해병 청룡부대 용사들이 고노이섬에서 작전을 벌이기 위해 헬기에서 내리고 있다. 청룡부대는 월남전에서 ‘귀신잡는 해병’신화를 재확인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북한은 1962년 4대 군사노선으로 군비를 증강했다. 우리 전력은 6·25전쟁 때만큼이나 열세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터지면 잃는 것은 휴전선,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종종 큰소리쳤다. 그런 때 미군 2개 사단의 이탈은 국가 위기였다.

결국 우리는 1964년 9월 외과병원 장병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병했다. 1965년 1월 8일 2000명의 군사원조단을 보냈고 비둘기부대·육군 맹호부대·해병 청룡부대를 파견하게 됐다. 8년간 연인원 31만2853명이 참전하게 됐다.

1972년 3월 사령부가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은 월남에서 신화적인 무공을 세운다. 그중 내가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은 '두코 전투'와 해병 신화(神話)를 세운 '짜빈동 전투'다. 맹호6호, 오작교, 암행어사작전도 그에 못지않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킵시다~’라는 노래로 유명한 맹호부대 용사들. 성대한 환송식이 열렸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다.
1966년 7월 맹호기갑연대 3대대는 미군의 '파울리비아'작전을 지원하러 캄보디아쪽 국경 4㎞ 지점의 두코(Duc co)로 이동했다. 이때 우리는 대규모 인원과 화력을 동원하는 미군과 달리 중대(中隊) 위주 전술기지 방어 개념을 도입했다.

8월 9일 밤 10시 40분부터 다음날 새벽 4시 30분까지 월맹군 2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아군 1개 중대를 기습했다. 적의 맹렬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교통호 속에서 견디던 맹호용사들은 미군 전차 2대가 지원해주는 틈을 타 반격에 나섰다. 백병전 결과는 대승이었다. 아군은 7명이 전사했지만 월맹군 189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잡았고 기관총·로켓포·실탄 수만 발을 노획했다. 미군사령관은 현장을 찾아 "보지 않고는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압승"이라고 했다.

당시 공격부대는 월맹군 88연대 2개 대대 700명 병력으로 아군보다 6배나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후퇴 때 꼭 시체를 챙겨 가는데 그럼에도 200명가량을 남긴 걸 보면 500명 가까이를 잃은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것이다.

다음 날 현장을 찾은 외신기자 중 1년 후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 된 모세 다얀이 있었다. 그는 당시 통신사 기자였는데 두코전투의 포병전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7년 6일전쟁 때 전격전(電擊戰)의 신화를 이끈다.

큰 전과를 올렸지만 월맹군의 보복이 걱정됐다. 다섯달 후 마침내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 파월한국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청룡부대 11중대가 타깃이 된 것이다. 청룡부대 주둔지 주변의 부락민들은 거의 적색(赤色)분자였다. 월맹군은 한국군의 손발을 묶으려는 듯 아이와 어린아이들을 맨 앞에 내세우며 공격해 왔다. 1967년 2월 14일, 짧았던 구정(舊正) 휴전이 끝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당시 11중대 1소대장이 지금 재향군인회 신원배 사무총장이다.

월맹군은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했다. 적 수백 명이 달려들었지만 2분대장 이중재 하사가 화염방사기 사수(射手)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쳐 무력화시킨 뒤 이진 병장, 김용길 중사가 수류탄으로 적 대전차유탄포·로켓 진지를 무너뜨렸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백병전은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결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적 1개 연대 공격을 우리 해병 1개 중대가 막아내자 미국 언론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고의 승전보라 평가했다.

닉슨 대통령도 나섰다. "17년 전(6·25전쟁 때)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쾌거입니다!" 이 전투 후 뉴욕타임스가 월맹의 지령문을 보도했다.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

월맹군은 한술 더 떠 한국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니 비무장 한국군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말라.' 전투에 참가한 병사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대한민국 훈·포상법 제정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국은 월남에서 유례가 없는 전과를 올렸다. 난 이게 절대적인 전력 열세 속에서도 조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한국군은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최강의 군대로 재탄생했다.

월요일, 8월 01, 2011

<<다음은 7월30일 전역한 해병 1103기 예비역이 쓴, 기수열외에 관한 체험담입니다.
인터넷에 돌기에 퍼왔습니다. 참고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구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해병대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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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

예...
절대 기수열외는 없어져야 합니다.
기수열외란 개념조차 생겨선 안됩니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니 문제입니다.

저희 중대에도 기수열외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기수에서 열외, 즉 해병대 하기싫어 하는 애들입니다.
예전 아주 오래된 대 선배 해병님들께서 군생활 하실땐 소대장도 빠따 치는걸 묵인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빠따 몇대 치는걸로 영창가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군기교육으로 인정했으니깐요.
그러나 요새 시대는 다릅니다. 멱살 한번 잡아도 영창갑니다.
물론 멱살 잡힌 당사자가 신고를 해야 합니다. 친고죄이지요.

이렇게 신고하는 애들이 많냐?
엄청 많습니다. 그리고 더 많아질 것입니다.
해병대가 좋아서 온 당사자들은 버팁니다. 힘들어도 참고 버팁니다. 이것이 왜 힘든지, 왜 이런 인계를 지켜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학시기 및 다른 이유로 해병대를 지원한 병들은 버틸 명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꼰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새는 싸가만 가르쳐도 영창갑니다. 진짜 입니다.
저희들은 선임들께서 물려주신 전통을 유지하려 많이 노력합니다.
그런데 어떤 녀석이 새벽 똥칸에서 자기 맞선임이 싸가를 자기에게 가르쳐줬다고 맞선임을 간부한테 꼰질렀다고 칩시다.

이런 새끼를 끝까지 저희가 끌고 가야합니까?
이런 핵폭탄 같은새끼와 같이 해병생활하면 병들의 전통 완전 없어집니다.

다 영창가고 다 전출가버리고...
제 밑으로도 기수열외를 하고 싶어한다고 제가 오장일때 고백했던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바로 기수열외 시키지 않았습니다.
기수열외는 최후의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루 혹은 일주일 더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독여줍니다. 맨날 저에게 맞은 후임지만 그 순간 만큼은 다독여 줍니다. 

그리고 다들 되돌아와서 다시 생활하겠다고,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존나 패버립니다. 기수열외를 하겠다고 말한 자체가 개찐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생활 잘 합니다.
이것처럼 저희들은 절대로 쉽게 기수열외를 시키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짜 핵폭탄 같은 새끼들...이런 새끼들은 저희가 끌고 갈수 없습니다.
그냥 해병 생활 안하는겁니다.
주먹으로 오고 가는 저희들의 특별한 유대감 등 모든걸 원하지 않는 새끼입니다.

기수열외=왕따?
절대로 아닙니다. 저희가 통상 알고 있는 왕따는 괴롭힘 당하는 존재입니다.
기수열외는 혼자서 싸제 생활하는겁니다.
이 기수열외새끼는 자기 선임들에게도 반말합니다. 그러나 선임들도 기분 나뻐하지 않습니다. 왜? 걔는 싸제 새끼니깐.
그러나 대신 절대로 해병취급을 안해주는겁니다.

기수열외 새끼 괴롭혀봤자 뭐가 좋겠습니까. 바로 꼰질러버리는데.
그냥 혼자서 싸제생활하게 내버려 두는겁니다. 투명인간 취급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것입니다.
생활이 힘들면 맞선임에게 보고해서 병들끼리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생활 자체를 싫어하는 새끼니까 어쩔수가 없습니다.

이병때부터 그냥 자기 하고싶은것 마음껏 하게 내버려둡니다.
끌고 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이새끼를 같이 끌고 가버리면 중대 ,대대 초토화 되어버립니다.

요새 간부들 어떤지 아십니까?
땅개 새끼들이 타 부대 고참들에게 '아저씨, 아저씨' 하는게 옳은 병영 문화라고 지껄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교육합니다.
참나 어이가 없습니다. 이런 간부새끼들과 협조하는 새끼를 저희가 끌고 가야합니까?
저 뿐만이 아니라 제 후임들 모두 기수열외는 옳지 못 한것이란걸 알고 있으나
정말 어쩔수 없습니다.

저희의 속 사정을 대선배 여러분께서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제 전역했지만
밑에 후임들이 너무 걱정됩니다. 정말...
이상입니다..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