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5월 27, 2011

해병대 뒤흔드는 '현역 소장 2명 구속영장 청구'


입력 : 2011.05.28 03:04

해병대 전체 少將 중 절반 구속영장
건설업자가 각서 조작한 듯 사령관 탈락측 사실 확인않고 부하한테 신고하도록 지시
상관 음해 혐의로 해병장성 구속은 처음… 일부 "구속은 지나치다"

특전사와 함께 최강의 전투부대로 꼽히는 해병대를 뒤흔들고 있는 '현역 소장 2명 구속영장 청구' 사건은 한 장의 각서로부터 비롯됐다.

진급 로비 각서 나돌아

지난 3월 국방부 근무지원단장 해병대 박모 준장은 평소 친분이 있던 건설업자 김모씨(경남 창원)로부터 눈이 번쩍 뜨일 문서 사진을 입수했다. 유낙준 현 해병대사령관과 '구성한'씨 명의의 도장까지 찍혀 있는 이 각서는 지난해 4월 10일에 작성된 것으로 돼 있었다.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이었던 유 사령관이 해병대사령관으로 승진할 경우 구씨에게 3억5000만원을 지급하되 5000만원은 현금으로, 3억원은 제삼자인 류모씨의 농협 통장으로 입금한다는 내용이었다.


유 사령관은 지난해 6월 동기생 홍모 소장과 경합 끝에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됐다. 그 직후부터 군 내부에선 유 사령관이 여권 실세에게 진급 로비를 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박 준장은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에서 문서까지 보게 돼 부하 수사관에게 군 수사기관인 국방부 조사본부와 포항지방검찰청에 이 의혹을 신고하도록 지시했다고 군 검찰 조사에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당국 조사 결과 이 각서에 등장하는 구성한이라는 인물의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또 류씨 통장에도 돈이 입금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수사당국은 해병대 장성들과 친분이 깊었던 김씨가 이 각서를 조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민간 검찰에 수사를 의뢰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 소식통은 "해병대 병사 출신인 김씨는 해병대 장성들과 친분이 두터웠다"며 "일부엔 목사로 알려졌으나 목사가 아니라 건설업자"라고 전했다.

박 준장은 지난달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대 2사단장이 됐다. 그러나 사단장 취임 한 달도 안 된 지난 10일쯤 김관진 국방장관의 지시로 국방부 감사관실에서 박 사단장에 대한 특별감사에 들어갔다. 김 장관은 군검찰에 "상관을 음해하는 군 지휘체계 문란 행위에 대해선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보직해임 및 수사 진행

해군은 지난 21일 인사심의위원회를 열어 박 소장 보직해임을 결정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상관(해병대사령관)에 대한 음해성 인사로비 의혹을 군 수사기관에 신고토록 부하에게 지시한 것은 직무범위를 넘어선 군 기강 문란행위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군 검찰은 26일 박 소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군 검찰은 지난해 유 사령관과 경합을 벌이다 탈락한 동기생 홍모 소장에 대해서도 박 소장과 공모해 군 기강(지휘체계)을 문란케 한 혐의로 같은 날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무고죄가 적용됐다.

이에 대해 군내에선 해병대 창설 이래 처음으로 상관 음해 혐의로 현역 장성에 대해 구속영장까지 신청한 것은 지나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유 사령관의) 진급로비설이 나돌던 터에 각서까지 보니 해병대 발전을 위해 진실을 규명해야겠다는 순수한 취지에서 수사기관에 알리게 됐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국방부 관계자는 "이들이 단순히 진급로비 소문을 전한 수준이 아니다. 김 장관이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까지 결심할 만한 중대한 사유가 있었다"고 말했다. 군 내부에선 이번 사건의 원인이 해병대 내부의 파벌 싸움에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유 사령관과 홍 소장이 진급을 놓고 다투다 홍 소장이 진급에 실패하자 해병대에선 "홍 소장 라인에 선 사람들이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 나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정체불명의 각서에서 비롯된 이번 사건이야말로 군 내부의 진급을 둘러싼 파벌 다툼과 투서(投書)의 문제를 또 한 번 드러낸 것이라 김 장관이 초강경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 김모씨는 지난달 10억원대 사기 혐의로 수배된 뒤 잠적한 상태다.

목요일, 5월 26, 2011

현빈, 군부대서 '백상예술대상' 대상 수상소감 전해

 
[엑스포츠뉴스=온라인뉴스팀 진주희 기자] 배우 현빈과 이병헌이 백상예술대상의 대상을 차지했다.

지난 26일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두 사람은 각각 TV부문과 영화부문에서 대상의 영광을 누렸다.

특히 지난 3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현빈을 백상예술대상 직접 찾아가 영상을 담아오는 열의를 펼쳤다.

현재 현빈은 경북 포항에서 7주간의 신병교육을 마치고 백령도 해병대 6여단에 자대 배치돼 국방의 의무를 수행 중이다.

현빈은 영상을 통해 "좋은 상 후보가 돼 기쁘고 훌륭한 선배님들과 거론돼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스태프분들 배우분들께 좋은 성과가 있는 날이길 바란다. 시크릿가든 사랑해주신 모든 분들과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최북단 백령도에 있다. 서북도서 사수와 제 임무에 충실히 임하겠다. 그리고 국민과 해병대에 충성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사진 = 현빈  ⓒ KBS 백상예술대상 방송 캡처]

해간 35기 소위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

 66년 8월 8일에 발생했던 이른바 해병학교 사관 35기 기초반 장교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의 진상을 공개한다.

사건의발단은 이러했다. 즉 주말인 8월 6일 부산에서 외박을 한 전도봉(全道奉) 소위를 비롯한 7명의 해병학교(35기) 기초반 소위들이 승차한 부산발 진해행 시외버스가 구포다리 건너 첫 번째 정류장에 정차했을 때 승객이 많아 버스의 앞문으로 승차하기가 어렵게 된 빨간 마후라를 두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김해공군비행학교 피교육 장교들)이 주먹으로 버스의 후문을 두들기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는데, 그 때 그 후문쪽 좌석에 윗저고리를 벗은채 앉아 있던 35기 소위 하나가 앞문으로 타 하고 소리치자 공군소위들 중의 하나가 이 새끼들…하며 앞문으로 갔고, 또 차안에서 누군가가 저 새끼가…하며 뒷문을 열어 제치고 뛰쳐 나간 것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 그 10여 명의 공군소위들은 윗저고리를 벗고 앉아 있던 7인의 해병소위들에 의해 묵사발이 되어 길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솜씨를 발휘했던 그 7인의 소위들은 '황 우'라는 두목을 굴복시켜 부산바닥의 주먹계를 평정(平定)한
패기만만한 투사들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공군소위들을 길바닥에 뉘여 놓고 버스에 올라타고 졸면서 가고 있던 그 7인의 소위들은 한참을 달리고 있던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하는 순간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버스를 앞뒤에서 가로막은 2대의 공군 닷지차에서 뛰어 내린 수십명의 공군장교들이 손에 든 몽둥이로 소위들이 앉아 있는 뒤쪽 창문을 박살을 내며 문을 열라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35기 소위 2명은 머리를 다쳤고, 승객들 중 진해여고 학생 1명과 해군소위 1명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해병소위들은 운전기사로 하여금 군용트럭 옆을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가게 함으로써 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공군장교들도 그 이상의 보복은 하지 않았다.

한편 귀교후 머리에 중상을 입은 1명의 동료장교를 진해병원으로 실어 보낸 35기 기초반 장교학생회에서는 취침시간을 이용하여 김도삼(중대장) 김무일(부중대장) 전도봉(군기부장) 등 3인의 간부와 각 근무자들과 소대장 등 13인이 참석한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자손심에 관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한 끝에 다음과 같은 행동계획으로 그 다음날 이른 아침 김해 공군기지를 습격하되 일절 무장은 하지 않고 복장은 정모와 카키 근무복을 착용키로 결정했다.
즉 전체인원 142명 중 입원환자와 보초 근무자등 13명을 제외한 129명이 8일(월) 새벽 2시에 기상하여 은밀히 철조망을 타넘고 경화역에 집결, 04시에 출발하는 열차에 승차하여(역장에게는 독도법 훈련을 위해 진영역까지 간다고 했고, 차비 대신 손목시계 30개를 맡겨 두고) 진영역에서 하차, 역전 도로변에서 3개 제대로 나누어 시계나 돈을 주고 화물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공군기지 정문 앞에 집결하기로 했는데, 결국 화물트럭을 타고 6시 10분 전에 공군기지 정문앞에 도착했던 1.2 제대는 서둘러 제대별로 대오(3열종대)를 정비하여 정문으로 진입을 헀으나 낌새를 챈 2명의 위병이 당직실 보고 운운하며 제지를 하는 바람에 지체할 겨를이 없었던 한 장교가 이 새끼 말이 많아하며 아구통에 일격을 가한 다음 그들의 무장(권총)을 해제시켜 그들을 앞세우고 비행학교 조종반중대의 막사가 있는 곳(정문에서 약 2키로)까지 기상나팔 소리를 들어가며 질서정연하게 구보를 해 갔다.

그리하여 6시에 기상하여 막사(퀸셑3동) 안팎에서 내무정돈과 세수를 하고 있는 약 50명의 조종반 장교들(소위)을 닥치는 대로 주먹과 내무실에 있는 운동기구 등으로 가격하여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그 현장에 버스를
타고 왔던 약 40명의 3제대 장교들이 도착했다고 한다.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갑자기 터진 연막탄을 신호로 전 기지의 장사명은 즉시 상의를 벗고 중앙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방송이 사방에서 들리자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기초반장교들은 몇몇 간부장교들의 의견에 따라 즉시 비행학교 당직실이 있는 학교본부로가서 정열을 했다.

그런 다음 당직실로 들어간 간부장교들이 당직사관 이양호 대위에게 양측 학교장(비행학교장과 해병학교장)에게 사태 수습을 건의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하자 이양호 대위(후일 국방장관 역임)는 학교장이 7시에 출근하니 그 때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기에 기초반 장교들은 당직실밖에 정열하여 왼쪽 손을 왼쪽 허리춤에 갖다대고 오른손을 흔들며 '나가자 해병대'가와 '청룡은 간다'등의 군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어느 새 구름떼처럼 연병장에 모인 갈고리와 쇠스랑 같은 소방기구와 돌맹이를 손에 쥔 약 2000명의 병력이 일제히 돌맹이를 던지며 접근해 오는 바람에 누군가의 제의로 격납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연습기의 날개 밑에 피신을 했으나 새까맣게 날아온 돌맹이가 격납고 속으로도 날아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철수를 단행, 활주로 끝에있는 철조망 지대까지 공군들의 추격을 받는 가운데 약 2키로를 구보하여 견고하게  가설돼 있는 철조망을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타 넘었으나 철조만 바깥쪽에 있는 70~80 야드 너비의 수초가 우거진 천연늪을 헤엄을 쳐서 건너는 과정에서 한 명(이모 소위)이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맨 뒤쪽에 쳐져 맥없이 껍북거리고있는 이 소위를 발견하여 늪 밖으로 끌어낸 사람은 김무일 소위와 이무수 소위였고, 이강오 소위를 비롯한 3~4명이 그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입과 항문이 열려 있는 그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결국 공군기지 내의 의무중대로 운반이 된 이 소위는 7시 50분 그를 검안한 군의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는데, 그 때 그 의무중대 병실에는 부상을 당한 20여 명의 비행종대 피교육 장교들과 12~13명의 해병학교 기초반 장교들이 엠불란스에 실려 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이 사건이 남긴 사법적인 처리문제와 관련된 비화이다. 진해교육기지사령부에서는 전도봉 소위를 비롯한 6명의 주동자를 구속하는 한편 35기 기초반중대의 중대장(송모 대위)와 구대장 3명도 구속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했다.그런데 그러한 조치와는 달리 약 한 달 전(7월 1일)에 제7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강기천 사령관은 엄벌에 처할 경우 특히 35기 장교들과 그 후배 장교들의 사기에 미칠 영향이 클 것으로 판단하여 사고를 낸 35기 장교들과 비행학교 피교육 장교들 간에 자매결연을 맺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여 공군참모총장(장지량 중장)의 동의를 얻은 다음 그러한 수습방안을 장 총장과 함께 김성은 국방부 장관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시하여 쾌히 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강기천 사령관은 장지량 총장과 함께 김해 공군기지와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부를 차례로 방문하여 유감표명을 했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쌍방 간의 자매 결연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 10명의 장교들(35기 6. 중대장 1. 구대장 3명)에 대해서는 강기천 사령관이 군법회의의 설치권자인 교육기지사령관 박성철 준장에게 선고유예를 하도록 지시를 했으나 박성철 준장은 자신이 임명한 재판장(훈련소장 강복구 대령)에게 2년을 선고해주면(검찰관의 구형은 5년형) 자기도 생색을 좀 내고 강기천 사령관도 감형을 할것이라고 했으나 처음부터 형을 선고할 생각을 갖지 않고 있던 강복구 재판장은 군법회의의 사회자가 "재판장의 선고가 있겠습니다"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회전의자를뒤로 돌려 면벽(面壁)을 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여러 차례의 선고공판이 유회되는 별 희한한 헤프닝이 벌어지곤 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법무감 이양우 대령은 사건을 마무리 짓기 위해 직접 진해로 내려가 핵심 주동자로 지목되고 있던 전도봉
소위에게 병역을 필하게 해 주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을 것을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그러한 권고를 받은 전도봉 소위는 함께 기소된 자기 이외의 모든 장교들을 석방시켜 준다면 기꺼이 군복을 벗겠다고 말함으로써 6개월 간 진해 해군헌병대 영창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아왔던 10명의 장교들은 전원 풀려나게 되었고, 그들 중 모든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었던 전도봉 소위만은 민간인의 신분이 되어 실의 낙향헀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일 후 전도봉씨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라는 병무청의 입영통지서를 받고 깜짝 놀랐으나 그 입영통지서를 들고 사령부 법무감을 찾아갔던 그는, 잘못 처리된 것을 사과한 이양우 법무감(후일 국회사무처장과 전두환 대통령의 법률고문 역임)의 권고로 국방부 소청심사위원회에 솟장을 낸 것이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전기(轉機)가 되어 월남전선으로 가는 조건 부로 소위의 계급을 되찾는 충격적인홍복을 누렸다.

그리고 그런 운을타고 났던 전도봉 소위는 그로부터 30년 후(96년 6월) 제 22대 해병대사령관이되어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왕년의 김해비행학교 당직사관 이양호(李良鎬)대위와 숙명적인 재회를 했다. 전해지고 있는 바에 따르면 구속 기소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던 이양호 대위도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고 하니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옥중에서 써 남긴 '必死卽生(필사즉생)'이란 글귀를 새삼 되씹어 보게 한다.
(그 때 이양호 대위는 정직 3개월의 징계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그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군복을 벗게 된 김해공군기지 당직사령 최 모 중령은 그 후 대한항공에 취업했으나 69년 12월 11일 그가 탑승(조종)한 강릉발 서울행 KAL기가 납북(승객 47. 승무원 4)되는 바람에 그를 악운을 타고난 사람으로 기억되게 했다.

수요일, 5월 25, 2011

기타 모음곡

기타 모음곡      
                                
1.백년의 약속-우대하
2.사랑의 눈동자-박진광
3.너를 사랑해-우대하
4.이룰 수 없는사랑-김재성
5.애증의 강-캐슬 


6.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이진석
7.나는 행복한 사람-박진광
8.연인-캐슬
9.숨어 우는 바람소리-김재성
10.존재의 이유-이경운
 
11.나 같은 건 없는 건가요-우대하
12.봉숭아-이진석
13.홀로 가는 길-이경운
14.사랑하는 그대에게-김재성
15.빗속을 둘이서-김재성 


16.민들레 홀씨 되어-우대하
17.암연-박진광
18.사랑을 미워해-이진석
19.비와 외로움-이경운
20.아직도 못 다한 사랑-김재성
 
21.밤에 떠난 여인-캐슬
22.사랑의 기도-박진광
23.사랑의 썰물-이경운
24.하얀 모래의 꿈-이진석
25.사랑을 잃어버린 나-이경운 


26.기다리는 아픔-캐슬
27.내일은 해가 뜬다-김재성
28.꼬마인형-박용강
29.유리창엔 비-우대하
30.이 연-이진석

 
31.초 연-이경운
32.님 그림자-김세환
33.꿈이어도 사랑할래요-김재성
34.길-우대하
35.천상재회-캐슬 


36.묻어버린 아픔-이경운
37.영 영-김세환
38.긴머리 소녀-김재성
39.찻집의 고독-캐슬
40.낭만에 대하여-박용강
 
41.파 초-우대하
42.네가 보고파지면-이경운
43.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김재성
44.그대는 모르시더이다-캐슬
45.석 양-박진광 
46.쓸쓸한 연가-우대하
47.산다는 것은-이경운
48.바람에 실려(saddle the wind)-김재성
49.비나리-박진광
50.애 수-캐슬


51.비 가-이경운
52.여 인-우대하
53.골목길-김재성
54.베사메 무쵸-박진광
55.애 원-캐슬(사승철) 


56.내 마음의 보석상자-파랑새(우대하)
57.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김재성
58.정주고 내가 우네-박진광
59.별이여 사랑이여-캐슬
60.우리사랑-파랑새(우대하)
 
61.내가 부를 너의 이름-김재성
62.제비꽃-파랑새(우대하)
63.목련꽃 필무렵-캐슬
64.야 화-김재성
65.당신 따라갈 것을-김재성 
66.바다의 여인-김재성
67.귀거래사-김재성
68.별이 빛나는 밤에-김재성
69.새벽편지-김재성
70.낯설은 아쉬움-김재성
 
71.그 여자가 가는 곳은-김재성
72.이 마음 다시 여기에-김재성
73.동백아가씨-김재성
74.백지로 보낸 편지-김재성
75.바람이 전하는 말-김재성 


76.바닷가에서-김재성
77.외길-김재성 78.더맨-김재성
79.비닐우산과 블루 레인코트-김재성
80.흰구름 먹구름-김재성


81.마지막 편지-김재성
82.찔레꽃-김재성
83.사랑은-김재성
84.얼룩진 사랑-김재성
85.잊혀진 님의 노래-김재성 


86.우 정-김재성
87.해 후-김재성
88.문밖에 있는 그대-우대하
89.옛사랑-김재성
90.그래 늦지 않았어-우대하
 
91.그대 그리고 나-김재성
92.불꺼진 창-김재성
93.애 인-김재성
94.TV를 보면서-김재성
95.내 사랑 울보-김재성 


96.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김세환
97.사랑이 저만치 가네-우대하
98.그리운 얼굴-캐슬
99.나무와 새-김재성
100.초 저녁-김재성
101.불나무-김재성
 





해병대 지휘부 '뒤숭숭'

 



[한겨레] 사령관 ‘진급로비’ 음해 논란…소장 4명 중 2명 소환조사“실세에 3억5천만원 주겠다는 각서썼다” 소문

진원지로 고위직과 친분있는 목사 지목돼

국방부, 진위 확인 ‘미적’…청와대 개입설도


인기 탤런트 현빈의 입대로 한창 주가를 높이던 해병대가 뒤숭숭하다. 유낙준(중장) 해병대 사령관을 둘러싼 불미스러운 소문과 관련해 해병대 사단장이 보직 해임된 데 이어, 유 사령관과 사령관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전 해병대 부사령관까지 군 당국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사달의 배경에는 음해와 청탁 문화 등 군내 장성 인사를 둘러싼 구조적 비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 군 당국, 해병대 장성 2명 입건 조사중 국방부 조사본부는 23~25일 박아무개(소장) 전 해병 2사단장과 홍아무개(소장) 전 해병대 부사령관을 소환 조사했다. 박 장군은 국방부에 근무하던 지난해 말~올해 초 부하직원에게 유 사령관과 관련한 소문의 실체를 파악하도록 지시한 혐의(직권남용)로 지난 22일 보직 해임된 상태다.

지난해 6월 유낙준 사령관 취임 뒤, 군 안팎에서는 유 사령관이 경북 포항에 위치한 해병 1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정권 실세의 측근에게 사령관이 될 경우 3억5000만원을 주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 사령관의 도장이 찍힌 이행각서 사본까지 나돌았고, 대구지검 포항지청에서 내사를 진행해 각서가 조작됐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소문의 진원지로 해병대 고위직들과 두루 친분이 깊은 김아무개 목사가 지목됐다.

하지만 김 목사는 당국에 ‘가짜 이행각서는 박 장군 등이 만들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박 장군 쪽은 ‘김 목사에게서 이행각서 얘기를 듣고 해병대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사실관계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을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국방부에서는 유 사령관과 해군사관학교 동기로 지난해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놓고 경쟁한 홍 장군이 박 장군을 내세워 유 사령관에 관한 음해설을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 논란 키운 군 당국…꼬리 무는 소문들 해병대 전체 소장 중 절반인 2명이 군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게 된 현실을 두고 군 내부에서도 자조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민간인 목사의 농간에 장성들이 놀아났다’, ‘복종을 생명으로 하는 해병대에서 부하가 직속상관을 음해하다니’ 등등의 반응이 그것이다.

군 당국의 석연찮은 태도가 화를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박 장군은 애초 각서 소문을 듣고 국방부 조사본부에 관련 내용을 제보했고 조사본부도 의욕적으로 나서려고 했는데 김관진 국방장관이 조사를 막았다는 것이다. 국방부 한 관계자는 “공식조사가 무산되자 박 장군이 부하 수사관에게 별도 지시를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군 당국의 뒤늦은 강경책을 두고서도 뒷말이 나오고 있다. 국방부에 근무하던 박 장군은 지난달 승진과 함께 해병 2사단장으로 발령났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 전에 걸렀어야 하는데, 지금에 와서 이 사건이 불거진 게 석연치 않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박 장군이 보직해임을 당한 이유는 부하 조사관에게 포항 현지에 내려가 조사를 하도록 했기 때문인데, 이 소식을 접한 청와대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며 국방부에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군 관계자는 “해병대는 폐쇄적이라 인사를 둘러싼 금품거래와 음해가 많은데, 이번 사건을 통해 그런 단면이 나타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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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23, 2011

현 해병대 사단장, '해병대사령관' 음해 사유로 보직 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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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웅 인턴기자] 현역 해병대 모 사단장(소장)이 해병대 사령관을 음해한 사유를 들어 보직 해임된 것으로 알려졌다.
5월22일 국방부 관계자는 "해군 참모총장의 지시로 21일 해군 인사심의위원회가 열렸다"며 "위원회는 P사단장의 소명을 들은 뒤 '직권 남용에 의한 군 기강 문란 행위를 했다'고 판단해 보직 해임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또한 이 관계자는 "해임 조치는 지휘권 차원의 조치"라며 "향후 징계위원회를 열어 징계 여부와 구체적인 징계 수위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방부 감사관실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0년 6월 취임한 해병대 사령관이 정권 핵심 실세에게 수억 원의 금품을 건네고 그 대가로 진급했다는 소문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해당 사단장이 소문을 퍼뜨린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군은 사단장 후임으로 해병대 부사령관인 이상훈 소장(해사 36기)을 내정, 근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임명할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 YTN 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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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5월 16, 2011

5.16과 해병 2여단

- 한강도하 -


(1) 혁명거사 목전에서 30사단의 배신, 그로 인한 혁명계획의 탄로, 혁명의 시간은 이미 접어들었건만 지금까지 출동한 혁명군은 어디에도 없다. 어쩐지 꼬여가는 듯한 상황에 박정희 소장의 가슴에는 불현듯 외로움과 착잡함이 한순간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 그러나 한밤중의 김포가도, 저기 저곳에 수백개의 헤드라이트가 줄을 긋고 있었다. 10여 리에 걸친 길고 긴 트럭의 행렬이었다. 혁명군 해병대가 서울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박정희 장군의 지프가 멈추어 섰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느낌, 싸늘한 밤공기 속에 박정희 장군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해병대는 육군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아니라, 오로지 해병대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였던 것이다. 또한 육군의 장도영 장군이 직접 해병대와의 통신연락을 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해병대가 혁명군으로 출동함은 숙명적이었던 것이다.
해병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15일 밤 11시를 기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발한다.
“명일 아침에 적 공수부대에 대한 역습훈련이 있으니 참가부대인 제2연대 1대대에 탄약을 보급하라”
이윽고 해병대는 계획대로 밤12시에 부대를 집합시켰다.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군목인 김광덕 대위로부터 혁명성공의 기원을 받는다. 16일 새벽 1시, 해병대는 선두에 제2중대를, 그리고 후미에는 제5중대를 세운 채 대대장 오정근 중령의 지휘 하에 구국의 일념으로 장도에 올랐다.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탱크부대에 지시하여 새벽4시에 출동토록 명령하고 즉시 차를 달려 부대후미에 따라붙었다.부대선두가 공격개시선으로 약속된 염창교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시간보다 15분이 늦었다. 염창교에는 혁명지도자 박정희 소장이 감격스런 표정으로 해병대를 맞이해 주었다. 육군측의 배신으로 혁명군이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김윤근 준장은 박정희 소장과 함께 정면대결로 나아가기를 검토한다. 아울러 공수단을 선봉군으로 삼으려 했던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해병대를 제1진의 선봉군으로 삼고 공수단은 제2진으로 삼았다.
역사에 찬란히 기록될 1961년 5월 16일 새벽3시, 혁명군 전초부대 해병대가 한강 인도교에 도달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한강물소리만이 밤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인도교 너머 저쪽 서울시내는 밤의 전등불들이 조는 듯 아늑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한강 인도교 돌파작전을 감행한다. 혁명군 전초부대인 해병여단 제2중대가 인도교를 들어서다 잠시 전진을 멈추었다. 선두차의 승차원이 모두 하차하는가 싶더니, 해병 제2중대장 이준섭 대위가 뚜벅뚜벅 인도교로 나아간다. 옆구리의 권총이 차갑게 마찰되었다. 이준섭 해병 대위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헌병 제7중대장인 김석율 대위와 악수를 교환하였다. 해병 대위는 헌병 대위에게 혁명군임을 알리고 인도교에 무겁게 내리워진 바리케이드의 철거를 정중히 요청했다. 헌병 대위는 간단히 거절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으로 이곳을 경비하고 있으며 혁명군을 저지시키기 위해 출동했습니다. 불응이면 사격하겠으니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에 해병 대위는 발끈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우리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는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해병이다. 우리는 해병대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부대다. 빨리 장애물을 제거하라.”
한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는 두 대위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2) 제1선 바리케이드가 인도교 남단에 GMC 2대를 八자형으로 해서 다리를 메우고 헌병 20여명 가량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제2선 바리케이드는 GMC 3대로 역시 八자형을 이루어 인도교 중간을 막고 있었으며 마지막 보루인 제3선 바리케이드 역시 GMC 2대로 八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강도하가 저지된 것을 확인한 해병 제1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전 해병에게 하차명령을 발했다. 헌병들이 길을 받는다면 그들과 총격전을 벌리는 한이 있어도 혁명은 기필코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라고 오정근 중령은 판단했다. 병력들이 GMC에서 하차한 것과 한강에 주둔했던 헌병들의 사격과 어느 것이 앞서 일어난 행동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헌병들의 위협사격이 시작되었고 하차한 해병들은 한강 인도교 저편에 빠른 동작으로 산개했다. 선두차에 탔던 해병 제2중대 병사들의 포복이 시작되었다. 탄우를 뚫고 포복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생과 사를 초월한 것이었다. 제1선의 바리케이드가 그들의 손으로 제거되었다. 총탄은 밤하늘에 빨간 여운을 길게 그리며 빗발처럼 옆을 스쳐갔다. 해병들은 이제 제2선 바리케이드 제거를 위해 인도교의 난간을 따라 포복을 계속했다. 제2선 바리케이드도 무너졌다. 전투는 점점 본격화되었다. 서로간의 위협사격이 어느새 무차별 사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제3선 바리케이드를 향해 용사들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제3선 바리케이드에서 낮처럼 밝은 헤드라이트가 비쳐왔다.
제3선 바리케이드에서 헌병 40여명 가량의 무차별 사격이 가해오고 있는 것이다. 해병들은 장애물에 막히면서도 좁은 난간을 따라 계속 포복을 하여간다. 혁명군 쪽의 지원사격도 가열되었다. 한강 인도교는 다시한번 6.25의 전상을 되씹고 있는 것이다. 해병들과 헌병들의 치열한 사격전은 혁명군으로 하여금 많은 시간을 인도교에서 머물게 했다. 마지막 보루인 제3선 바리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작열하는 총성속에 전진하던 해병 제2중대에 부상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대장 이준섭 대위를 비롯해 7, 8명의 사병이 총상을 입었다. 완강한 헌병들의 저지사격은 해병 제2중대에 예기치 않았던 총격전과 부상자를 내게 하면서, 혁명군의 전진을 지체케 하고 있었다. 제1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제1중대로 하여금 제2중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선두에 나가도록 명령했다. 이제 제2중대는 뒤로 서고 정비된 제1중대가 앞에 섰다. 치열한 응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3선 바리게이트 GMC헤드라이트가 해병들의 직격탄에 파열되면서, 인도교는 다시 암흑의 세계로 변하였고 그제서야 헌병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강 인도교는 혁명군의 전진을 거의 1시간 동안이나 묶어놓고 있었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고, 참으로 길고 긴 인도교였다. 헌병들이 물러가고 제3선 바리게이트가 철거되면서 이윽고 해병들과 그 뒤를 이어 공수단 병력들이 한강을 도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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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진주 -

(1)한강 인도교에서 해병들과 헌병들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 지역을 담당하던 용산경찰서는 새벽 3시의 총성을 단순한 오발사건으로 생각해 버렸다. 관내 파출소에 연락해 보았으나 장소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소리가 연방 계속해서 울리자 시민들의 문의전화가 용산서로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시민보다 담당자인 경찰측이 더 했었다.
3시 40분쯤 북한강파출소로부터 해병들이 육군헌병들과 충돌하여 인도교를 포복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왔다. 그러나 용산서는 이것도 단순한 충돌사고로 생각했다. 3시 50분쯤 잠을 자다가 유탄을 맞고 부상당한 신계동의 한 주민이 차에 실려 왔을 때 용산서는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4시가 약간 지나서 해병대가 경찰서 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그들은 상부로부터 하등의 지시도 받지 못했다. 당황한 일부 경찰관은 줄행랑을 놓았고 적대행위를 하던 경찰관은 모두 연금되었다. 이제 해병대와 공수단은 인도교를 건넜다. 캄캄한 밤, 장도영 장군의 명령에 따르는 진압군의 공격이 언제 어디서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차피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 혁명군들은 앞에총의 자세로 긴장감 속에 한발 한발 서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한강로를 지나갔다. 삼각지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혁명군들은 무장한 정체불명의 수많은 군인들이 어두움 속에 길 양편으로 도열해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손에는 M1소총이 쥐어져 있었고 밤하늘에 희끗희끗 번쩍이는 대검들이 꽂혀 있었다. 일순간 진격하던 해병들이 주춤했다. 적인가 아군인가, 식별이 되지 않는 군대이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면 적일 뿐이다. 해병들은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그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아, 그들은 적이 아니었다.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군대는 혁명계획에 입각하여 미리 육군본부 광장에 스며들었던 제6군단의 포병단이었다. 그들은 인도교의 교전으로 인하여 늦게 진입해 들어오는 혁명군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었다. 삼각지에서 조우한 혁명군들의 표정에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선의의 미소가 감돌았다. 그들은 모두 “시내는 조용하니 차를 타고 가라.”고 외쳐 주었다.
6군단 포병단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해병대와 공수단은 시가전의 위험이 없음을 알자 곧장 차에 올랐다. 한강 인도교의 격전으로 말미암아 늦어진 계획시간의 차질을 메꾸어야 했다. 박정희 장군은 손수 공수단 1개소대를 이끌고 남산 중앙방송국으로 달렸다. 해병대와 공수단 주력부대는 서울역 방향으로 달렸다. 서울역 앞에는 약간의 경찰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가볍게 그들을 격퇴시킨 혁명군은 이제 그들이 맡은 목표지점을 향해 힘차게 GMC의 페달을 밟는 것이다. 해병대는 치안국과 시경이 그 점령목표였다.
치안국 점령을 명받은 해병 제3중대와 제6중대는 4시 30분경 치안국을 완전히 포위했다. 중대장의 발포를 신호로 일제히 담을 넘어 뛰어 들어갔다. 개머리판을 옆구리에 댄 체 구부려쏴 자세로 밀려들어오는 해병들...... 이 광경을 본 내무부 차관 및 각 과장들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았다. 시경은 해병 제1중대와 제5중대의 담당이었다. 별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접수되었다. 지하실에 숨어있던 경관들이 스스로 총을 버린 채 걸어 나왔다.
여세를 몰아 해병 1개 소대는 시청을 지나 중앙전신국으로 달렸다. 유선망의 운용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전원실의 퓨즈가 해병대 장교에 의해 절단되었다. 야간근무를 하던 여자 교환수들은 놀라서 토끼처럼 뛰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공산반란군의 침입으로 오인하고 무척 당황해하였다. 하지만 해병대 장교의 설명으로 비로소 혁명군임을 알고 안심을 하는 것이었다.

(2) 공수단 일개소대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방송국을 점령코자 출발했으며, 또 일개소대는 혁명공약, 선언문 등을 인쇄하고 있던 광명인쇄소에 급파되어 경비임무를 담당했다. 이곳에는 김종필 중령 등이 돌아가는 윤전기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 외 공수단 주력은 시청 앞에 그 지휘본부를 두고 반도호텔을 점령하고 장면총리 이하 정부요인 체포의 임무에 당해 있었다.
행동대는 반도호텔로 직행하고 병력의 일부는 장면 총리의 퇴로차단과 광화문과 미 대사관 주변에 잠복했다. 그러나 반도호텔 808호실은 텅 비어있었다. 혁명군 도착 15분 전에 이미 장 총리 부부는 호텔 동쪽 문을 빠져나와 미 대사관을 거쳐 혜화동 방향으로 도주한 뒤였다. 반도호텔을 포위하고 있던 공수단은 장면총리를 놓쳤으나, 혁명급보를 듣고 장면 총리를 만나러 반도호텔로 달려온 현석호 국방장관과 한통숙 체신부장관 및 김업 국방부 사무차관 등 정부요인을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한 공수단 1개 소대를 이끌고 중앙방송국을 접수한 박정희 장군은 공산반란군으로 착각하고 도망쳐버린 아나운서와 기술자들을 찾느라고 고생을 했다. 원래 중앙방송국에는 장도영 참모총장의 지시로 헌병 60명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장군 일행이 도착하기 10분전, 그러니까 4시 20분경 철수해버렸기 때문에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취를 감춰버린 아나운서와 기술자들을 우여곡절 속에 겨우 찾아내면서 그들은 예정대로 새벽 5시에 가까스로 혁명의 방송을 내어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의 소리는 그 순간에도 혁명을 반대하고 있는 장도영 장군의 이름으로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감격어린 혁명 제 1성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졌다. 육군항공학교장 이원엽 대령이 여의도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이 대령의 지시로 몰래 상경한 교관조종사 5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 대령의 지시대로 기꺼이 하늘에 떠서 새벽의 서울거리에 10만장의 혁명전단을 살포했다. 5월 16일의 아침은 몹시 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19는 저공비행을 감행하면서 혁명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시위편대로 힘차게 하늘을 날아서 갔다.      <끝>

토요일, 5월 14, 2011

부마 항쟁 그리고 해병대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말라"


똑같은 계엄군이지만 진압방식은 너무도 달랐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에서 비롯됐다. 반면 그보다 7개월 전인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부산과 마산에 진주한 해병대는 비폭력으로 일관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군사기밀로 묶여 있는 부마항쟁 당시 해병대의 ‘활약상’을 처음 공개한다.


부마항쟁 당시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 

5·18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관객의 정서를 가장 자극하는 장면은 공수부대의 유혈진압 장면이다. 비록 발포 경위와 희생자 수를 둘러싼 논란이 있긴 하지만, 육군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한 폭력과 집단 발포로 많은 시민이 죽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각종 자료와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며,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된 이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을 통해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렇듯 5·18은 국민의 가슴에 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은, 창군(創軍) 이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그보다 약 7개월 전인 1979년 10월에 발생한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위진압군이던 해병대가 보인 태도는 그와는 딴판이었다. 부산과 마산에 투입된 해병대원들은 철저하게 비폭력 노선을 지켰다.

그간 해병대의 부마항쟁 시위진압 실태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뒷날 광주의 비극을 일으킨 공수부대는 부마항쟁 때도 투입됐는데, 그때도 시위진압 방식에서 해병대와 달리 폭력적인 양태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왜 그토록 달랐던 걸까.


‘건방지다’고 개머리판으로 때려 뇌수술

널리 알려졌다시피 부마항쟁은 10·26사태의 도화선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처리를 놓고 온건론을 내세운 김재규와 강경론을 주장한 차지철 사이에 불신의 골이 깊어진 가운데 차지철을 두둔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김재규가 총으로 시해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전개된 부마항쟁의 신호탄은 1979년 8월11일 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회사의 여공들을 강제 해산시킨, 이른바 YH사건이었다. 이어 9월8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과 10월4일 김 총재의 의원직 박탈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10월15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골자로 한 민주선언문이 부산대학교에 배포되고, 16일엔 이에 동조한 부산대생 5000여 명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교문을 뛰쳐나온다. 이후 동아대학생 1000여 명과 시민들까지 가세해 시위대는 순식간에 도심을 장악하고, 시위대를 막기 위해 경찰 3400여 명이 최루가스를 뿌리며 진압에 나섰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날 밤 시위인파는 5만여 명으로 불어났고, 폭발한 민심(民心)은 파출소와 공화당 지부 사무실 등 공공건물에 방화하며 이튿날인 17일까지 시위를 계속했다. 정부는 긴급히 육군 2관구사령부(현 53사단) 병력을 투입했지만, 정상만 사령관의 지프와 호위차마저 습격을 당할 정도로 시위는 격렬했다. ‘단 한 방울의 물도 새나가서는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완벽한 통제를 자랑하던 유신체제였기에 부마항쟁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박희도 준장이 지휘하던 1공수여단과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박구일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대 1사단 7연대를 투입한다. 마산에는 20일 정오를 기해 위수령을 선포한다.

이후 시청과 역 등 주요시설을 장악한 1여단과 3여단은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워 시위대를 진압한다. 특히 이들 공수부대 장병들은 이후에도 총기에 착검을 하고 트럭을 이용해 부산대와 동아대를 하루 종일 오가며 학생들과 시민들을 위협한다. 단순히 심리전 차원만은 아니었다는 게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이다.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송기석(56)씨는 “얼굴에 시커멓게 위장 크림을 바른 공수부대원들이 참나무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시민들을 구타했다. 20, 30대 청년들은 길을 걷다가 그들과 마주치면 아무 이유도 모른 채 맞아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31세이던 전병진씨는 서면 한독병원 앞을 지나다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장교가 휘두른 M16 소총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아 뇌수술까지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지역 언론사에도 제보됐지만, 계엄령하에서 철저히 덮여 있다가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진상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맞아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

5·18민주화운동 당시 진압군인 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곤봉으로 구타하고 있다. 

이처럼 공수부대의 활동상에 대해선 어느 정도 알려진 반면 해병대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는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해병대 1사단 7연대가 부산대학교를 주둔지로 삼았다는 사실만이 공개됐을 뿐이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병대의 진압과정은 충정훈련으로 단련되고 최루탄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와는 매우 달랐다.

당시 군 작전상황에 대한 기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다. 기록물 존안(存案) 당시인 1980년 ‘향후 30년 동안의 기밀’로 분류돼 2010년에 빛을 볼 예정으로 육군 문서보관소에서 먼지만 들이켜고 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학술과장인 이동일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달리 부마항쟁에 대한 군 관련 기록은 전혀 공개된 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계엄군으로 참여한 해병대 관계자들과 현장에서 지켜보던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3공수여단의 대규모 병력과 달리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라는 소규모 병력이 계엄 1진으로 투입돼 시위진압에 나섰다. 7연대 71대대와 72대대는 10월26일 수영비행장 투입 직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맞아 지역 관공서와 부산대로 이동했다.

해병대는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는 달리 시위진압시 학생들과 시민들이 던진 벽돌과 돌멩이에 맞아 피를 흘려도 묵묵히 ‘무력(無力)행진’으로만 시위대를 밀어냈다. 제일 앞줄은 간부와 병장이, 두 번째 선은 상병이, 그 뒤로 일병, 이병이 서서 총기 멜빵끈으로 서로 팔을 동여맨 채 시위대에 대응했다. 앞줄이 돌에 맞아 쓰러지면 뒷줄이 앞으로 나섰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이등병은 앞에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학생시위대의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해병대원들이 계속 전진하자 나중엔 주변의 시민들이 나서서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뒷날 해병대사령관 역임) 7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는 지시를 내렸다. 박구일 연대장이 장병들에게 직접 정신교육을 했던 내용은 해병대 예비역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박구일씨는 후에 14대 국회에 진출, 민자당 전국구 의원을 거쳐 1992년 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박 전 의원은 기자의 거듭된 요청에도 당시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학생으로 시위대에 참여했다는 김현숙(48)씨는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맞기만 하는 해병대와는 재미가 없어 시위를 포기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빵, 우유 건네

10월20일 마산과 창원지역에 내려진 위수령으로 505명이 연행되고 59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부산에선 1058명 연행, 66명 군사재판 회부)되는 것을 끝으로 부마민주항쟁은 일단락됐다. 10·26사태 직후 공수부대 1여단과 3여단은 부산에서 철수했지만, 해병대는 남아서 계엄작전을 계속했다. 주된 작전은 ‘위민 및 선무활동’이었다.

10월27일 소대별로 부산역과 시청 등 관공서로 이동한 해병대는 건물 인근에 있는 싸리나무를 잘라 빗자루를 만들어 오전, 오후 매일 2시간씩 주둔지 건물 주변과 골목길 등을 청소했다. 특히 해병대 1사단의 의전행사 담당부대인 32대대(일명 99대대)로부터 근무교대 의장식을 전수받아 시민들의 이동이 잦은 출·퇴근 및 낮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선보였다. 국기 게양식과 군가를 우렁차게 부르게 행진하는 해병대원들의 구보 광경도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시위대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뽑아놓은 가로수 받침대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도심 교통정리도 해병대의 몫이었다.

이쯤 되자 시민들은 계엄군인 해병대를 신뢰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군복을 입고 버스를 타거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 무료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열흘 전 시위학생들에게 우유며 음료수, 빵 등을 나누어주던 시민들이 그때부터는 해병대원들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유신독재의 먹구름이 걷히며 민주주의 햇살이 부산 일대를 환하게 비추었다.

당시 부산역 주변에서 술집을 운영했다는 박경미(64)씨는 “계엄령이 내려져 밤 10시면 통금이었는데 고위 공무원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돌아가지 않고 난동을 피우는 일이 종종 있었다”면서 “이럴 때면 해병대에 신고해 이들을 쫓아내곤 했다”고 말했다.

“여러 번 신세를 져서, 집으로 가기 전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해병대 초병에게 술과 안주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한번은 바지주머니 속에 술병과 안주를 집어넣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더라. 내심 ‘이게 바로 해병대구나’ 하고 감탄했다.”

당시 부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는 강민호(61)씨가 들려준 얘기도 비슷하다.

“해병대가 오기 전에는 수송, 보급 등 육군 기간병들이 주둔했다. 해병대는 이들과 달랐다. 국기게양식과 경계근무, 아침 구보 등 하나부터 열까지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 공무원들, 특히 여직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주둔지 관공서 여직원과의 사랑

71대대 소대장으로 계엄임무를 수행했다는 박용감(53)씨는 “시민들에게 인기가 좋기는 좋았던지, 오토바이 뒤에 해병대 깃발을 꽂은 채 환호하면서 우리 주위를 빙빙 돌던 시민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한번은 병사들이 칼같이 다려 입은 얼룩무늬 위장복을 입고 2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인형인 줄 알고 눈을 찌르기도 했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지만, 국민 앞에 서면 한없이 순한 어린 양이 됐다.”

이처럼 계엄군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는 평화스러운 위민활동에 해병대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와 자랑스러움은 깊어갔다. 특히 절도 있고 패기 넘치는 해병대원을 바라보는 젊은 여성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총포탄의 ‘화려한 휴가’지였다면, 부산은 시민과 계엄군 간 불꽃 튀는 사랑의 ‘아름다운 휴가’지였다. 실제로 부산에서는 계엄군과 한 여성이 사랑을 꽃피워 결혼에 골인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해병대 김모 소위는 박 대통령 시해 다음날인 10월27일, 주둔지이던 부산대를 떠나 한 관공서에 주둔하게 됐다. 준수한 외모의 김 소위는 이듬해 2월 철수하기 전까지 박구일 연대장의 지침에 따라 위민활동을 하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A씨를 만났다. 이후 포항으로 원대복귀한 김 소위는 외출·외박을 나갈 때마다 A씨와 만나 사랑을 쌓았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김 소위의 동기생들과 주변 인물들을 수소문한 끝에 9월말 당사자인 김 소위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2001년 소령으로 예편했다는 그는 자신의 ‘아름다운 휴가’에 대해 한마디로 “우연이자 행운이었다”고 표현했다.

부마항쟁 당시 계엄군 1진으로 부산대에 주둔한 해병대는 7연대 73대대였다. 김 소위가 소속된 7연대 71대대는 2진으로 72대대와 함께 10월26일 수영비행장에 주둔하다가 부산대로 옮긴 뒤 이듬해 2월 철수했다. 하지만 김 소위는 1진 투입 전 73대대로 배속됐다.

“계엄군 투입일에 앞서 당직근무를 섰다. 이튿날 오전 근무취침을 하려는데 중대장이 급히 찾더니 소대원들과 함께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하루 종일 내무반에서 대기했는데, 밤 11시경 중대장이 불러 ‘73대대에 배속됐으니 그곳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73대대에 합류했다.”


차비 안 받는 버스 안내양

그는 “당시 소대장은 인접 중대에도 많았고, 우리 중대에도 여럿 있었는데 하필 내가 73대대로 배속돼 투입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끝내 실명을 밝히지 않은 그는 결혼에 이르게 된 구체적인 경위와 연애 스토리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리 우리가 그곳에서 잘하고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지금 사람들은 계엄군 투입 자체를 좋게 보지 않는다”면서 말을 맺었다.

1980년 2월 철수 전까지 4개월간 계엄군으로 부산에 주둔했던 해병대 1사단은 그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에 따라 또다시 대구(연대본부, 21대대), 마산(23대대), 부산(22대대)에 상주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는 7연대가 해안방어부대로 이탈하고 2연대가 계엄 임무를 맡는다. 한편 광주에는 3·7·11여단 등 공수부대가 주력군으로 투입된다.

광주가 공수부대의 강경진압과 시민군의 반발로 피비린내가 진동했던 데 반해 해병대 1사단 2연대가 투입된 대구, 마산, 부산은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시민들의 시위는 광주 못지않게 격렬했지만 계엄군의 대응방법이 달랐다. 정행원 2연대장은 부마항쟁 당시의 박구일 7연대장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학생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절대 그들을 자극하지 마라”는 지침을 내렸다.

당시 2연대 작전주임으로 현장에 있었던 김현기 예비역 대령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국민이 돌 던지며 때린다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 국민보다는 우리가 더 많은 피해를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엄작전에 임했다”면서 “부마민주항쟁 당시 닦아놓은 해병대의 위민정신과 평소 체계적인 훈련으로 쌓은 해병정신 덕택에 큰 탈 없이 작전을 끝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때도 부마민주항쟁 진압 당시 톡톡한 효과를 본 무력(無力)행진이 우리의 유일한 진압방법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광주민주항쟁 당시 집단 발포와 관련된 ‘자위권 발동’ 논란에 대해 “최근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면서 ‘자위권 발동’에 대한 명령과 수용 여부가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차이로 비쳐지고 있지만, 해병대에도 분명 ‘자위권 발동’이라는 용어는 존재했다”고 밝혔다. 그는 “다만 우리는 6·25전쟁 당시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 전투에서 24개의 목표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하사받은 ‘무적해병’이라는 명칭과 한국군 최초의 상륙작전인 통영상륙작전을 보고 ‘뉴욕타임스’ 기자가 붙인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칭호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광주와 부산의 지형적 차이

부마항쟁 계엄작전에 참여했다는 또 다른 관계자도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해병대의 역사적 전통이 나 때문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당시 대원들 사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서 “해병대의 성공적인 진압 작전은 이를 듣고 생활하며 훈련해온 장병들이 위기 때 보여준 좋은 사례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아직까지 문서로 정리돼 보존되거나 언론을 통해 드러난 적은 없지만, 부마민주항쟁과 5·18계엄 당시 보여준 해병대의 위민정신은 지금도 후배 해병대원들에게 구전(口傳)되고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 예비역들의 증언에는 자화자찬도 섞여 있는 듯싶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한 육군 예비역의 증언을 들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1980년대 초반 친구인 해병대 장교와 함께 부산에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버스 안내양이 나한테는 차비를 받으면서 해병대 친구의 차비는 한사코 받지 않는 것이었다. ‘야, 왜 네 차비는 안 받는 거냐?’ 하고 물었더니 친구는 멋쩍게 웃음만 짓고 아무 대답도 안했다. 버스 안내양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 해병대가 인기가 좋기는 좋구나’ 하는 느낌이 확 왔다.”

10월12일을 시작으로 11월24일까지 부마민주항쟁 28주년 행사가 부산과 마산에서 성대히 열린다.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동일 학술과장은 광주와 달리 부산과 마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사망자 없이 항쟁이 마무리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마항쟁 당시에도 시위가 아주 격렬했다. 주요 관공서, 방송국이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광주와 같은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배경은 우선 지형적 여건의 차이다. 광주는 도로 몇 곳만 봉쇄하면 완전히 고립되고 통제된다. 그러나 부산과 마산은 바다를 등지고 있어 완전 통제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시위진압에도 한계가 있다. 또한 ‘계엄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군이 투입됐더라도 시위나 저항이 계속됐느냐’ ‘진압과정에서 대치하는 쌍방이 어떤 폭력을 수반했느냐’에 따라 양상은 크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군 통수권자의 차이도 있다. 부마항쟁 와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된 것도 큰 변수였다. 만약 통수권자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면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3공화국이 저물어가던 시기. 박 대통령은 부산과 마산의 소요사태에 격노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의 소요사태를 시찰했다.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는 시위대를 대하는 순간 그는 전율했다.

10월26일 궁정동 비밀안가에서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보고하면서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훗날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결국 뒤이어 집권한 신군부는 광주에서 박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했다.

근래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의 민사작전이 국내외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이 우리의 민사작전 교범을 도입할 정도로 대민 및 위민활동은 한국군이 단연 뛰어나다는 게 정설이다. 1979년과 1980년 부산에서 보여준 해병대의 계엄작전은 한국군의 정신사에서 흑요석처럼 빛나는, 성공적인 민사작전의 시초라 할 만하다.

그러면 ‘왜 이제까지 해병대의 ‘미담’이 묻혀 있었을까, 왜 지금껏 국민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하다. 답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있다. 한 해병대 예비역 장교는 “당시 계엄군을 총지휘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이 다 특전사 출신인데, 해병대의 진압과정과 공수부대의 진압과정을 언론이 비교하도록 놔뒀겠냐”고 반문했다.

 
“해병대가 광주에 투입됐더라면…”

또 다른 해병대 관계자도 “당시 전두환 정권은 해병대의 전통을 인정하는 듯했으나 ‘어떻게 하면 해병대의 위상을 격하시킬까’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면서 “박정희 대통령도 월남 파병 이후 비대해진 해병대를 버겁게 여겨 1973년 사령부를 해체하고 사령관 계급도 대장에서 중장으로 끌어내려 해군에 통합시켰다”며 해병대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제기했다. 그는 “이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씨가 해병대 표심(票心)을 얻기 위해 1987년 11월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하기까지 해병대는 14년간 시련을 겪어야 했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특전사와 해병대의 지휘계통과 정치적·지역적 상황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당시 해병대를 광주에 투입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하지만 “해병대가 광주에 투입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는지 모른다”는 말로 5·18민주화운동의 또 다른 희생자인 공수부대원들의 처지를 배려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책임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에서 숨어 지내다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나는 업무를 수행하면서 사람을 죽이려는 어떤 의도도 갖고 있지 않았고, 유대인에 대한 그 어떤 증오도 없었다. 다만 제3제국이 ‘합법적’으로 나에게 부과한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며 “나의 위치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그도 동일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재판을 지켜본 정치철학자 한나 이렌트는 아이히만이 악의 화신도 괴물도 아닌 극히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이히만의 증언을 들은 세계는 경악했다. 아이히만 개인이 유대인에 대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 이런 ‘완전한 무사고(無思考)’가 그가 유죄인 이유였다. 이에 대해 이렌트는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교훈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부산·마산과 광주에서 전개된 군의 진압방식 차이를 두고 ‘공수부대는 악하고 해병대는 선하다’는 이분법을 세운다면 옳지 않다. 공수부대나 해병대나 명령에 충실히 복종하고 국민의 군대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진압과정 차이는 ‘명령과 복종’으로 대변되는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에서 지휘관 등 상급자의 의식과 태도, 그리고 조직이 존재하는 목적에 대한 구성원의 공감대가 어떤지에 따라 얼마나 상반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라 할 만하다.

우선 해병대 7연대는 박구일 연대장이 직접 나서서 장병들에게 작전에 임하는 자세와 목적에 대해 정신교육을 하고, 그 공감대를 바탕으로 부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광주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이와 같은 교육이 없었고 ‘내가 왜 광주에 왔는지’에 대해, 다시 말해 부대의 출동 목적에 대한 주체적인 자각이 없었다.

공수부대와 해병대의 진압과정 차이를 조직구조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군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해병대 지휘계통은 공수부대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해병대는 적 후방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펴는 것이 주목적인 부대다.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

 그렇기에 간부 중심 지휘체계인 특전사에 비해 해병대는 병(兵) 통솔만으로도 작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병대의 지휘체계는 소대나 중대 단위로 작전임무를 수행할 때 적의 집중 폭격이나 사격을 받아 전멸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평시 소규모 분대 단위의 전투훈련에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간부 중심으로 구성된 공수부대는 원리원칙을 존중한다. 그들은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상부의 지시를 철저히 수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당한 명령에도 공수부대원들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모토처럼 공수부대에는 ‘안 되면 되게 하라’ ‘사나이 태어나 한번 죽지 두 번 죽냐’는 상징적 표현이 존재한다.

심리학의 유명한 학설인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은 1961년 스탠리 밀그램이 처음 이론화했다. 그는 사람들이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는 성격보다는 상황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대단히 설득력 있는 상황이 발생하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입증했다. 이러한 상태를 복종을 넘어선 단계, 즉 ‘응종(應從)’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심리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에게도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그들이 불합리한 상부의 명령에 복종해 시민들을 강경하게 진압한 것도 인간 내부에 잠재된 심리적 본성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특히 책임을 명령권자와 희생자들에게 돌리며, 도덕적 판단의 의무로부터 회피하려는 것은 군과 같은 조직사회의 구성원이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